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기차가 희망을 죽이다_이효석 "돈(豚)"

설왕은 2020. 2. 22. 09:00

 

 

이효석(1907~1942)이 1933년에 조선문학을 통해 발표한 단편 소설입니다. 단편 소설 중에서도 매우 짧은 단편입니다. 1936년에 메밀꽃 필 무렵이 발표되었으니까 그보다 3년 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돈 때문에 돈(豚, 돼지)를 키우면서 돈 때문에 멀리 떠나간 분이를 생각하는 한 청년이 죽을 뻔한 이야기. 그래서 결국 돈(돼지)도 죽고 돈도 날아가고 분이를 찾으러 가고자 하는 희망도 깨집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주제가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밀꽃 필 무렵"과 비슷합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나라의 어떤 소설가도 마음대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효석의 작품이 가지는 핵심 모티프가 애욕 예찬으로, 사회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을 띄고 있다고 비판도 하는데요. 그가 그런 주제를 잡지 않았다면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효석의 작품은 사회 도피의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무렵부터 이효석은 자신이 쓸 수 있는 글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간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메밀꽃 필 무렵"도 나올 수 있었겠지요. 

 

 

이효석은 소설을 마치 시처럼 쓰는 재주는 발휘하는 작가입니다. "돈"에서도 그런 능력을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옛성 모롱이 버드나무 까치 둥우리 위에 푸르뎅뎅한 하늘이 얕게 드리웠다. 토끼우리에서는 하얀 양토끼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까칠하게 웅크리고 있다. 능금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벌판을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채녹지 않은 눈 속에 덮인 종묘장 보리밭에 휩쓸려 돼지우리에 모질게 부딪친다."

 

까치둥지 위에 푸르뎅뎅한 하늘, 까칠하게 웅크린 토끼, 눈밭을 스치면서 모질게 부딪치는 바닷바람과 같은 묘사가 참 적절하고 아름답습니다. 산문으로 되어 있는 글을 연과 행으로 바꾸어 쓰고 위에 제목만 하나 적어 놓으면 그냥 시가 될 것 같은 문장입니다. 

 

 

이 소설은 마지막이 매우 허무합니다. 주인공 식이는 자신과 사귀던 이웃집 분이가 어느 날 도망을 가서 그 소식을 제대로 알 수 없자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봅니다.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식이는 돼지를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묘장에서 돼지의 씨를 받아서 얼른 돈을 벌고 싶었는데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신없이 걷다가 달려오는 기차에 돼지가 치여 죽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끝이 납니다. 소설의 주인공 식이에게서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식이는 매우 무기력해서 이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식이는 아마 절망을 품고 살아갈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 희망은 있는가,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효석은 그냥 없다, 하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절망감이 느껴집니다. 식이는 가난을 벗어나려고 돼지를 키우는데 결국 열차라는 신문물의 강력한 힘에 의해 돼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저는 어떤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효석의 "돈"은 단편 소설이라기보다는 긴 일기 같은 느낌입니다. 무기력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서술하면서 희망을 품지도 않습니다. 쓰러질 것 같은 자기 자신이지만 그래도 쓰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느낌입니다. "메밀꽃 필 무렵"은 그래도 좀 더 희망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는데요. 아마도 처음에는 그냥 희망 없이 절망했다가 나중에는 긍정적인 자세를 취해 보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사랑은 이룰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자족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이효석은 병에 걸린 아내와 둘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친일 행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아내와 둘째 아들은 1940년에 둘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효석도 2년 후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이효석의 슬픈 일대기로 인해 "돈"의 주인공 식이의 절망이 더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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