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7분설교] 교회에 있는데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_시편 120

설왕은 2020. 3. 22. 10:00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루 빨리 코로나 19가 사라져서 우리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 일상이 정말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코로나 19로 인하여 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갇혀서 서로 분리되어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 예배가 다시 열릴 때까지 시편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입니다. 교회 예배가 다시 열리기를 마음으로 원하고 기도하면서 시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20편입니다.

 

( 120, 개정)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시편의 시를 몇 개의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요. 시편 120편은 탄식시입니다. 시인은 괴로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1절부터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인이 괴로운 이유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를 가진 사람들 때문에 시인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을 미워합니다. 표현이 아주 거친데요. 물론 이러한 표현은 시인의 상상입니다. 속이는 혀한테 무엇을 줄까 시인은 상상해 봅니다. 시인의 마음 같아서는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을 꽉 박아 주거나 뜨거운 숯불을 가져다가 혀에 대 주고 싶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미웠으면 시인은 이런 상상을 할까요? 시인이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문제입니다. 메섹과 게달에 머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화평을 미워합니다. 시인은 그런 사람들과 너무 오래 살았던 것이지요. 시인이 화평을 말해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싸우고 싶어합니다.

 

시편 기자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로 자기를 속이는 사람들을 겪다 보니 너무나 그들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화살로 저 사람 좀 꽉 쏴주었으면 아니면 숯불로 그냥 혼 좀 내 주었으면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인은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싸우고 싶어 해서 시인은 괴롭습니다.

 

살다 보면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웬만하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은데 싸우자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죠. 아마도 그들이 그런 폭력을 당해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폭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싸움에서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덤비는 것이겠죠. 요새는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감옥에 가겠다는 마음먹고 달려드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여기 시편 기자도 주변 사람들의 입과 혀를 미워하죠. 꼭 욕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뱉어 놓고도 그들은 자신은 별생각 없이, 나쁜 의도 없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 없음, 의도 없음은 항상 문제가 됩니다. 생각 없이 돌을 막 던지면 누군가는 그 돌에 맞습니다. 생각을 하고,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뱉은 말은 누군가에게는 돌이 되어서 그 사람을 칠 수도 있습니다.

 

 

시편 120편을 읽으면 이 시가 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을 잘 읽어 보니까 시인은 괴로운 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생각할 때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떠나야 합니다. 완전히 떠날 수 없다면 잠시만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좋겠죠. 어디로 피할 수 있을까요? 어디로 가야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로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피할 수 있을까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거친 세상과 호전적인 이웃들로부터 피해서 평화를 말하고 좋은 말을 건네 주는 사람들을 만나러 시인은 성전에 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저도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 집에서 예배를 드려도 되지요. 하지만 예배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공동체의 일입니다. 집에서 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안 드리는 것보다 낫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공동체의 예배입니다. 신앙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믿고 같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를 가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서 평화를 말하는 이웃들과 웃으면서 삶의 긴장감을 풀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코로나 19 사태가 해결이 되야겠지요. 그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교회 안 가서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교회를 의무감으로 다닌 분들이고요. 교회 다니는 것,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것을 정말 사랑하신 분들은 아마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 같습니다.

 

메섹과 게달에서 벗어나 평화를 전하는 여러분들과 만나서 맛있게 식사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될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