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여행이 모독이 될 수도 있다_박완서 "잃어버린 여행가방"

설왕은 2021. 3. 5. 10:49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박완서 작가의 기행 산문집입니다. 책의 제목만 보면 여행에서 생긴 재밌는 에피소드를 묶어서 낸 가벼운 기행 산문집일 것 같은데요. 책의 내용은 가볍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가볍게 시작하기는 하는데 점점 무거워지고요. 종반부에 이르면 한 발 한 발 떼기가 버거울 정도입니다. 여행에서 생긴 일 중심이라기보다 작가의 생각이 중심인 기행문입니다. 

 

이 책 속에 소개된 "잃어버린 여행가방"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는 제목 그대로 여행 중에 잃어버린 여행가방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경매에 부쳐서 사람들에게 파는 항공사에 대한 이야기도 재밋거리로 첨가를 하고 있고요. 보통의 기행문이라면 여행가방을 잃어버려서 생긴 웃긴 일들, 혹은 황당한 일들이나 곤혹스러운 일들을 주로 다루었을 텐데요. 박완서 작가는 여행가방을 잃어버리는 사건 자체로 인해서 그리 당황하지도 않고, 의외의 사건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 일로 통해 진지한 생각을 합니다. 

 

Image by Mikes-Photography from Pixabay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2부 1장에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책이 가벼운 기행 산문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내용부터 박완서 작가의 힘든 여행기가 이어지더군요. 점점 더 고된 얘기가 나오더니 4부에서 티베트와 카트만두 기행은 읽는 사람도 같이 힘들게 했습니다. 왜 이렇게 고되게 여행을 다니셨을까, 하고 궁금했는데 '책 뒤에 붙이는 글'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기행 산문집은 1997년 학고재에서 나온 티베트-네팔 기행문 "모독"을 재출판한 것으로서 기존의 기행문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혹독한 여행기 위주로 담은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국내 여행지는 오지 체험이 아니라 박완서 작가가 즐겨 찾는 고장에 대한 이야기여서 국내 여행 기록을 담은 책의 초반부는 가볍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온 여행지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들었는데요. 하나는 나도 박완서 작가가 간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국외 여행지는 가기 어렵더라도 국내는 어렵지 않게 갈 수 있고 나도 이런 곳에 가면 박완서 작가가 느꼈던 것을 같이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섬진강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섬진강변이었다. 푸른 들 푸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추수를 앞둔 논의 빛깔은 수시로 아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빛깔이 바로 저 빛깔이 아니었을까 싶게 그 빛깔은 단순한 심미안을 넘어 더할 나위 없이 깊은 평화와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우리 길을 마냥 따라오는 코스모스 또한 가을 논을 바탕색으로 하여 바라볼 수 있어서인지, 그 자태가 그렇게 간드러질 수가 없었다. (p.38)

 

 

섬진강 Image by  youngki son  from  Pixabay

섬진강이 무엇이 그렇게 특별하길래 박완서 작가는 '역시'라는 단어를 썼을까, 궁금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 '박완서 작가가 간 곳은 나는 가지 말아야겠다'였습니다. 일단 여정이 일반적인 여행서와는 다르게 매우 고된 여정이었고요. 그리고 작가의 내공이 워낙 깊어서 따라 해 봤자 작가가 느끼고 생각한 것의 반의 반도 따라가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따라 하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책에서 박완서 작가는 혼자 혹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 아닌 특별하고 유명한 지인들과 함께 여행을 하거든요. 마치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처럼 애써서 여행을 하고 많은 것을 느껴내고 생각해냅니다. 

 

국내 여행지에 대한 박완서 작가의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전 세계 이곳저곳을 다녀 본 사람이 우리나라가 좋다고 하는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완전 공감했거든요. (저는 박완서 작가처럼 전 세계 여기저기를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서 10년 정도 살았는데 미국의 풍경보다 우리나라의 풍경을 더 좋아합니다. 미국은 끝없는 지평선과 그 위에 바로 맞닿아 있는 하늘, 그리고 하늘에 끊임없이 그려지는 구름과 환상적인 색깔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나라 풍경은 아기자기하고 푸근한 맛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풍경을 더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우리나라여서 그런 것이 물론 있고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고속도로나 국도를 타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풍경을 보고 있자면 안기고 싶고, 여기서 죽어서 묻히면 편안히 잠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나라의 자연처럼 아기자기하게 아름다운 자연은 지구 상에 어디에도 없다. 신이 온갖 좋은 것을 다 모아다가 공들여 꾸민 정원 같다. 하나도 넘치게 준 게 없이 다만 조화롭게 주었을 뿐이다. 거기 몸담고 사는 사이에 인성 또한 근면 절약하지 않고는 먹고살기 힘들게, 협동하고 배움에 힘쓰지 않으면 나라를 보전할 수 없도록 형성됐다. 이런 고상한 인품이야말로 어떤 풍요보다 은혜로운 자연의 혜택이다. 가장 후졌다는 시골이 보석처럼 빛나 보였던 것도 인간과 자연의 그러한 그지없이 아름다운 조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p. 26)

우리나라 산천은 참 좋은데, 한 가지 큰 문제는 아파트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파트가 흉물스럽게 보기 좋은 그림을 다 가리거든요. 그러니까 개발이 덜 된 곳일수록 더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야 공간이 좁고 사람이 많이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고층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지만 인구 밀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지방 도시나 시골에 생뚱맞게 지어져 있는 아파트를 보면 참 한숨밖에 안 나옵니다. 

 

파스텔조로 사위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그날 온종일 한 번도 공장이나 고층아파트의 회색빛 직선을 보지 못하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아, 바로 그거였구나. 오늘 하루 누린 평화와 행복의 원인이 바로 그거였구나. 그건 소리라도 지르고 싶게 놀랍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p.48)

Image by Giani Pralea from Pixabay  

작가의 해박한 지식을 통해서 여행지에 대한 설명뿐만이 아니라 뜻밖의 정보들도 많이 알 수 있었다는 점도 이 책이 주는 장점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박완서 작가는 여행을 통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 먼저 출판되었던 기행 산문집의 제목이 '모독'이었다는 것은 박완서 작가가 티베트를 여행하면서 느낀 주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한 짓은 적선도 보시도 나눔도 아니었다. 같은 인간에게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순전히 인간에 대한 모독이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이 작은 도시 여기저기 뒹구는 게 화학 연료의 마지막 쓰레기인 비닐 조각, 스티로폼 파편, 찌그러진 페트병 따위 생전 썩지 않는 것들이었다. 뚱뚱한 식당 주인을 나무랄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우리의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 순환의 땅엔 모독이었느니. (p.215)

 

Image by Jan Vašek from Pixabay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참 좋아합니다. 시간이 나면 여유가 되면 어디 멋진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여행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여행도 때로는 인간의 지나친 욕망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이 때로는 모독이 될 수도 있다는 박완서 작가의 말은 곱씹어 볼 만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 이 책을 읽고 나서 '여행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 못했나 봅니다. 어딘가로 떠난다면 우리나라에 있는 푸근한 시골 마을 같은 곳으로 가서 직선이 아닌 곡선을 실컷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 정지해 있는 것들과 함께 머물러 있고, 무채색이 아닌 편안한 천연색 속에서 향기가 있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여행가방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겠지요?

 

박완서 작가는 이 여행산문집을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네팔에서 어쩌다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는 걸으러 온 사람이다.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뛰는 사람보다도, 달리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 (p.252)

 

저도 걷는 것, 걷는 사람 좋아합니다. 걸을 때 좋은 점은 멍 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걸을 때는 사고날 위험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복잡한 도시에서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 안 되겠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곳에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걷는 게 좋은 점 또 하나는 중간에 멈출 수 있다는 거죠. 차를 타고 다니면 중간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도 마음대로 멈출 수 없습니다. 걸을 때는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는 이유로도 한참동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걸으면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걷는 것처럼 살고 싶습니다. 아마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종종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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