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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우연이 다일까?_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설왕은 2021. 4. 7. 14:34

우연과 필연, 자크 모노/김진욱 옮김 (범우사, 1996)

 

자크 모노(1910-1976)는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로서 1965년에 <효소와 바이러스 합성의 유전적 제어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특이한 이력으로, 모노는 세계대전 당시에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도했다고 하는군요. 1971년에 나온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은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진화를 설명한 명저입니다. 이 책은 다소 어렵고 딱딱하지만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수십만 부가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여하튼 이 책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다윈의 진화론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제목은 "우연과 필연"이지만 주장의 내용은 온전히 '우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크 모노는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DNA의 복제 과정을 비롯한 생명의 탄생 과정은 우연이라는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연이라는 원리는 생명의 탄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화를 주도하는 원리이기도 하고 더 확장해서 우주 역사 전체의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입니다. 

 

"우연과 필연"은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진화론을 옹호하는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진화론이 옳다는 것을 분자생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책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다윈의 진화론, 그러니까 "종의 기원"과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은 중심 주장이 같은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읽어 보니 아니더군요. 자크 모노가 모든 것은 우연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다윈의 주장은 이와는 다릅니다. 물론 다윈도 생물의 변이 과정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종의 기원"의 중심 생각은 아닙니다. "종의 기원"은 종이 고정되어 있어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멸종하기도 하고 새롭게 발생하기도 한다는 주장이 중심 생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윈은 변이와 선택이라는 진화의 작동 원리는 새로운 종의 탄생에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변이와 선택이 진화를 발생시키는 전부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자크 모노는 변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우연의 원리가 진화를 비롯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성 원리라고 주장하고 있죠. 그런 면에서 다윈과 자크 모노의 주장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주장을 구분하지 않으면, 다윈의 주장과 모노의 주장이 같고 다윈의 진화론이 의미하는 바는 모노가 설명하는 바와 똑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희한하게 된 것이 이론으로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훨씬 더 유명하고 진화론에 대한 설명으로는 모노의 주장이 더 유명하다는 것인데요. 결국 사람들은 모노의 우연의 원리가 다윈의 진화론이 의미하는 바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윈의 "종의 기원"과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크 모노는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우연의 법칙이 작동하는 사례를 설명합니다. 대표적으로 DNA가 복제되는 과정에서도 우연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뿐만 아니라 단백질의 구조를 살펴봐도 우연의 법칙이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2백 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단백질이 있다고 하면 199개의 아미노산 잔기의 배열 순서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한 개의 아미노산 잔기를 예측할 수 없다고 언급하면서 자크 모노는 단백질의 구조 역시 우연의 법칙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자크 모노가 말하는 우연의 의미는 확률의 용어로 말하면 모든 사건이 독립 시행된다는 의미와 비슷합니다.(127) 마치 주사위를 199번 던져서 나오는 숫자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200번째에 어떤 숫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자크 모노는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연의 반대인 필연은 앞에 일어난 사건에 의해서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크 모노가 말하는 우연과 필연의 의미는 이와 같습니다. 

 

자크 모노는 생물학적인 우연의 요소와 더불어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의 원리까지 가지고 와서 두 개를 합칩니다. 우연의 법칙을 더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 책의 주요한 주장이고 자크 모노는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이용해서 생물학적인 우연의 원리를 확장했는데 이 시도는 성공해서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어 냈습니다. 

 

 

"물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에 의하면 어떠한 미시적 존재도 양자적인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이 거시적인 계 속에서 축적되면, 서서히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145)

 

자크 모노는 이런 식으로 불확정성의 원리와 생물학적 우연의 법칙을 통합하는데요. 이렇게 합치는 것이 저는 다소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전자와 같은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파악할 수 없다는 원리인데 그래서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우연의 원리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크 모노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독립시행적으로 결정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양자의 위치만 생각해 보죠. 양자의 위치가 이전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영향을 받는다면 우연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자크 모노는 양자 세계에서 이와 같은 우연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보고 있는데요. 양자의 현재 위치는 이전 위치에 의해서 파악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연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양자의 현재 위치는 이전 위치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독립 시행은 아니기 때문에 우연의 법칙만이 작동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즉 생물학적인 우연의 법칙과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완전히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시 자크 모노가 이해하는 우연과 필연을 설명하면요. 우연은 앞의 사건에 의해서 현재 사건이 결정되지 않는 예측불허성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필연은 앞의 사건에 의해서 현재 사건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자세계의 불확정성까지 고려한다면 이 세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우연이라는 법칙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크 모노는 진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자연이 영위하고 있는 이 거대한 놀이의 규모와 그 속도를 생각해 볼 때, 역설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 오히려 생물권에 보이는 '형'의 안정성이라는 것이다." (157)

 

자크 모노에 따르면, 종이 안정적으로 보존되면서 자손을 낳는 것이 오히려 기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죠. 우연의 법칙에서 보면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가 고양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오히려 개가 계속해서 개를 낳는다는 사실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자크 모노는 생물학의 미개척 분야가 진화의 양극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원초 생물 시스템의 기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출현한 것 중에서 가장 합목적적인 시스템, 즉 인간의 중추신경계의 기능이다." (177)

 

이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하나의 살아 있는 세포가 출현한다면 그 세포에서 다양한 생물이 분화되어서 나오는 진화는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최초의 단세포 생물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자크 모노는 단세포 생물의 출현 과정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설명합니다. 

 

1. 생물에게 필요 불가결한 화학적 성분, 즉 뉴클레오티드와 아미노산의 형성
2. 이 재료로부터 복제능력을 가진 최초의 고분자 형성
3. 이 ‘복제능력을 가진 구조’의 주위에 합목적적 장치를 구축하고 원시적 세포가 형성되는 진화 발생(177-178)


한 개의 세포가 탄생한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한 개의 세포에서 모든 생명은 시작되었으니까요. 자크 모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포는 35억 년 전 지구에서 한 개가 발생했습니다. 엄청난 일이었고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세포조차도 원시적인 데는 전혀 없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유전 암호와 그 번역 기구의 기원이다. 실제로 이것은 문제라고 해서는 불충분하며, 오히려 완전한 수수께끼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0)

저는 자크 모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즉 생명의 탄생도 우연이었고 진화도 온전히 우연의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래서 이 우주는 우연의 법칙에 의해서 작동하고 있다는 모노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그래도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이유는 자크 모노가 왜 이렇게 우연의 법칙을 굳건히 믿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단세포 생물의 탄생이 35억 년 전 단 한 번 발생했던 사건이라면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이러한 결정적인 사건은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가설의 가능성은 현재의 생물권의 구조로 보아 도저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출현할 선험적인 확률이 거의 제로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82-183)

 

우연히 생명이 탄생했을까요? 자크 모노도 최초의 생명의 탄생에 대해서 말할 때는 우연의 법칙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수수께끼'라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그 최초의 생명도 우연의 법칙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46억 년의 지구의 역사상 단 한 번 발생했던 일을 우연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운명이나 누군가의 결정에 의한 필연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 사건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인류의 출현이라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으므로 우리는 일체의 인간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184)

 

저는 이 문장도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의 출현이 지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면 이것은 오히려 인간의 존귀함을 말해주고 있으며 인간중심주의에 빠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흔하지 않은 것일수록 소중한 것이니까요. 

 

"우연과 필연"이 이렇게 끝납니다. 

 

 

"인간은 마침내 자기가 이전에 그 속에서 우연히 출현하였던 무관심하며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단지 홀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운명이나 우리의 의무는 어느 곳에도 쓰여 있지 않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 '왕국'과 암흑의 나락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다." (227)

 

우울한 결말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선택의 여지를 남겨 두기는 했습니다. 물론 자크 모노는 암흑의 나락을 선택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저는 자크 모노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저는 왕국파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었던 이유는 암흑의 나락파의 주장에 어떤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자크 모노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일단 원시 세포가 탄생한 이후에 일어나는 다양한 생물의 출현 과정을 고려해 본다면 우연의 법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도 같습니다. 35억 년 전 세포가 처음 탄생한 이후의 생태계의 역사를 우연이라는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이전의 지구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까지 우연의 원리로 확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죠. 그런데 자크 모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생물학자의 시야가 35억 년 전까지만 미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변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우연의 원리를 전우주적 형이상학적 원리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35억 년 전 태어났던 단세포 생물의 특별함을 과연 우연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가 고양이를 낳지 못하고 일정한 범위 내에서 종이 안정적으로 보존되는 것 역시도 우연의 원리가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죠. 우연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제가 볼 때 선택의 문제, 철학의 문제, 혹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자크 모노의 주장은 "우연이 다다'입니다. 모노의 주장에 반대하는 저의 주장은 "우연이 다가 아니다"입니다. 물론 저도 우연의 법칙이 우주의 작동 원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연의 원리가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자크 모노의 강력하고 파격적인 주장은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지만 저에게는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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