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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2021-2] 괜찮다는 말이 참 괜찮네_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설왕은 2021. 5. 12. 17:46

* 2021년 2월 28일 분당성화교회 청년부 독서 모임 두 번째 책으로 함께 읽었습니다.

* Reading 2021-두 번째 책

* 첫 번째 책은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였습니다. 

 

장영희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예쁜 에세이집이다. 잡지에 기고한 짧은 수필을 모아서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아주 전형적인 수필집이다. 어렵지 않게 쉬운 글로 쓰였고 심각하고 복잡하지 않아서 꼭꼭 씹어 먹을 필요 없이 가볍게 소화할 수 있는 책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건강 샌드위치와 같은 책이다. 

 

Image by LuckyLife11 from Pixabay  

 

책을 읽으면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작가가 자신에 대해서 그다지 능력이 없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장영희 교수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연구실적을 냈는지 잘은 모르지만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일단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를 받는 것은 베트남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국문학 박사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잘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그것도 6년 만에. 보통 미국 사람들도 박사 학위 과정에 7년에서 8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1980년을 전후로 해서는 더 짧게 걸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논문을 다 쓰고 한 번 도둑을 맞아서 다시 쓰는 1년의 시간이 들었는데도 6년으로 학위를 마쳤다는 것은 초고속으로 학위를 받은 것이다. 그를 도왔던 여러 가지 주변 여건이나 개인의 조건 같은 것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이다. 한 마디로, 장영희 교수는 능력자이다. 

 

장영희 교수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에 장애가 생겼고 암에 걸려서 투병 생활을 했다. 이로 인해서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경험과 관점을 가지게 되었고 이 책의 곳곳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괜찮아"라는 글이 마음에 들었는데 몸의 불편함으로 인해 느꼈을 작가의 감정이 찡하게 전달되었다.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말의 느낌은 달라진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130-131)

 

 

Image by Murray Rudd from Pixabay  

나는 '괜찮다'는 말을 찾아보았다. 우리말인지 중국글자말인지도 궁금했고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좋은 뜻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는 호기심도 생겼다. '괜찮다'는 우리말이지만 공연(空然)하지 않다는 말이 줄어든 말인 것으로 보인다. 공연은 "아무런 까닭이나 실속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괜찮다는 말은 아무런 실속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좀 다르게 표현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이런 뜻으로 이해한다면 세상이 괜찮고 내가 괜찮고 네가 괜찮다는 말은 세상은 살 만한 곳이고 나도 너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되겠지. 공연하지 않다는 말이 괜찮다는 말로 줄어든 이유는 아마 이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가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괜찮다'는 말이 참 괜찮다.

 

"오늘이라는 가능성"이라는 글에서 장영희 교수는 암 검사를 받은 일화를 적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충격을 받기도 했고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그는 암 검사를 받았고 이상이 있어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결국 악성이 아닌 양성으로 판명되어서 다행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반전이 있었다. 그렇게 샘터에 올린 장영희 교수의 글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수필을 쓸 때 이렇게 꾸며서 써도 되는 것일까, 하는 것 때문이었다. 암 판정을 받은 것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이렇게 둘러댔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솔직하게 썼어야 하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그는  거짓말을 했을까? 

 

'왜?'라는 물음에 나는 별로 논리적인 답을 할 수 없다. 그냥 내 마음이 시켜서 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며 난 그때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신에게 내가 불운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내 자유의지와 노력만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오로지 건강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우월감을 느낄 사람들이 미웠고, 무엇보다 내가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내 병은 나와 가족만의 비밀로 하고 몰래 투병하기로 했다. (p.60)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나는 장영희 교수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책의 중간중간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그가 부탁받은 내용이거나 그가 쓰고 싶은 내용도 아니니까 조금씩 들어가 있을 뿐이다. 에필로그의 제목은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이다. 희망을 품는 것이 좋다는 그는 힘주어 말한다. 눈먼 소녀가 작은 섬 꼭대기에서 구조받기를 희망하며 비파를 켜고 있는데 물은 점점 차오르고 있다면 그 소녀의 노래는 너무 헛된 희망의 노래가 아닌가, 라는 한 학생의 질문에 장영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을 것이고, 그럴 바엔 노래를 부르는 게 낫다고. 갑자기 물때가 바뀌어 물이 빠질 수도 있고 소녀 머리 위로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구해 줄 수도 있다고. 그리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p.235)

 

Image by ShonEjai from Pixabay  

 

사람들은 희망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그렇다. 하지만 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의 생각의 전환을 가지고 온 것은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카뮈는 말한다. 희망을 버리라고. 그리고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희망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앞낲에 대한 희망 때문에 현재의 삶을 망쳐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뮈의 말처럼 희망을 던져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구분한다. 현재를 망치는 희망은 버려야 하지만 현재를 살게 해주는 희망은 품어야 한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힘겹게 현재를 버티는 사람들에게 새봄이 올 것이니 함께 노래를 부르며 기다리자고 말하고 있다. 새봄이 안 오면 어떡하냐고? 그러면 그냥 노래만 부른 것인데...

 

노래로 끝나도 괜찮다. 그 노래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그렇게 우리의 현재를 깨워 주는 희망이 있다면 무조건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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