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성화설교] 반드시 기다리십시오_시편 130편

설왕은 2021. 6. 8. 00:24

* 2021년 6월 6일 분당성화감리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시 130, 개정)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인사

반갑습니다.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신 또한 온라인으로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용기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가 나름 유튜버인데요. 일주일 전쯤에 별거 아닌 것이 별거다라는 영상을 올렸습니다. 사랑과 친절을 나타내는 별거 아닌 것 같은 말과 행동이 우리 삶에 정말 특별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올린 영상입니다. 별거 아닌 것을 제가 또 생각해 봤습니다. 숨 쉬는 것도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숨 쉴 때 특별하게 숨을 쉬지 않습니다. 숨을 쉬는 것을 의식하면서 쉬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별하지 않지만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큰일납니다. 여러분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성도님들이 의도치 않게 한두 주씩 예배를 빠뜨리게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괜찮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별거 아닌 것 같은 예배가 특별한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삶이 바뀝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처한 상황도 바뀝니다. 예배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정말 특별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 특별한 예배에 함께 하시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내용 설명

시편 130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하나이며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탄식시에 해당합니다. 탄식시는 아이고, 나 죽겠네하는 시입니다. 내용을 보시면 개인탄식시인 것 같지만, 아마도 공동체가 함께 간구하기 위해 사용했던 시편으로 보입니다. 6절까지 자주 나오는 라는 대명사는 공동체에 속한 개인을 의미합니다. 시편 130편에서 시인의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시편 130편은 기쁨의 시라기보다는 슬픔의 시이고, 빛이 깃드는 찬란한 시가 아니라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시입니다. 긍정적인 단어가 조금 있기는 합니다. 파수꾼, 아침, 인자하심, 속량과 같은 단어가 긍정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파수꾼이 지키고 있고, 곧 아침이 올 것이고,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속량, 곧 구원하실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시의 전체 분위기는 매우 어둡고 우울하고 혼란스럽습니다.

 

1절에 보면 시인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 단 두 개의 단어로 시인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시인은 깊은 곳에 있습니다. 깊은 곳은 깊고 어두운 물 속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드라마 보면 가끔 주인공이 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공이 어두운 물 속에 계속 가라앉는 장면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요. 바로 그 장면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어둡고 깊은 물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굉장히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촉구합니다. 내 소리를 들어달라고 그리고 귀를 기울여 달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시편 130편 내에서는 시인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면 좋은데 응답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3절에서도 희망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을 보시고 따지고 물으신다면 누가 제대로 설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시인이 뭔가 대단한 잘못을 했던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누가 스스로를 깨끗하고 완전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라는 확신도 있습니다. 5절에서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하셨다던가 혹은 용서를 말씀해 주셨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수꾼의 기다림

6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6절을 제대로 이해해야 시편 130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기다림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기다림이 있을 수 있지만 두 가지로 구분을 하겠습니다. 기다림에는 즐거운 기다림이 있고 떨리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즐거운 기다림부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요새 유명한 맛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맛집에 가면 가자마자 식당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 데도 있고 줄을 길게 서 있는 곳도 있습니다. 대충 줄을 보고 한 시간 정도 기다려서 차례가 될 것 같으면 배고픔을 견디며 줄을 서기도 합니다. 점점 더 배가 고파지지만 배가 고프면 음식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법이죠. 이럴 때 기다림은 즐거운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다림이 즐거운 기다림은 아닙니다. ‘즐거운 기다림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떨리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떨리는 기다림을 느낄 수 있는 때가 많지는 않습니다. 저도 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언제 떨리는 기다림을 경험했는지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때 단체로 벌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체벌을 하지 않지만 그때는 체벌이 일상사였습니다. 단체로 벌을 받을 때 매를 맞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럴 때 매를 맞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경우는 떨리는 기다림입니다. ‘떨리는 기다림은 매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말이 있는 것이겠죠. 몸이 아픈 것보다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더 괴롭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림은 즐거운 기다림이 있고 떨리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6절에 나온 파수꾼의 기다림은 즐거운 기다림일까요, 아니면 떨리는 기다림일까요? 파수꾼의 기다림은 떨리는 기다림입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이유는 적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 지키고 있는 것이 지루해서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파수꾼이 높은 망대에 서 있는 것은 일출을 구경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기다림은 긴장감이 넘치는 떨림의 기다림입니다. 여러분이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상상을 해보십시오. 성에 세워진 높은 망대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적군이 근처에 와서 이미 주둔하고 있고 며칠 내로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낮에는 긴장감이 덜합니다. 일단 잘 보이기 때문에 적이 침투하고 있는지 몰려오고 있는지 알 수 있고, 아군도 다 깨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밤에는 상황이 달라지죠. 성밖에 누가 가로등을 켜 놓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적군이 몰래 성에 가까이 오고 있어도 아주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모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아군은 대부분 잠들어 있습니다. 아군과 적군의 군사력이 비슷한 상황에서 적군이 한밤 중에 갑자기 기습 공격을 하면 전투에서 지거나 버티더라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적군이 기습 공격을 한다면 누구부터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파수꾼을 죽여야겠죠. 적이 기습 공격을 한다면 파수꾼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가장 먼저 죽을 가능성이 큽니다. 파수꾼은 의무감이나 뿌듯한 마음보다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떨리는 기다림으로 간절히 아침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즐거운 기다림보다 떨리는 기다림이 기다림의 간절함이 훨씬 더 강합니다. 떨리는 기다림, 파수꾼의 기다림은 강도가 셉니다. 아주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면서 빛줄기 나타나기 시작하면 파수꾼은 큰 안도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다림이 있는가?

시인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기다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이 간절함을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강조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 구절에 비추어 우리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간절한 기다림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하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기다리며 크게 부르짖었던 이유는 시인이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혼돈의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에 구원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부조리 가운데, 어둠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을 바라고 하나님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깊은 곳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도움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30편에 나온 속량이라는 단어는 매우 실질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실제의 위험으로부터 구출과 같은 구체적인 도움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 기자와는 달리 하나님의 실질적인 구원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어려움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서 스스로 실천하든가 아니면 희망을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을 기다리는 분도 있고 기다리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반드시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을 기다리시는 분들에게 고합니다. 하나님을 더 간절히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기다림이라는 것 자체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즐거운 기다림이건 떨리는 기다림이건 상관없이 기다림은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맛집에 가면 가자마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싶으세요, 아니면 한 시간 정도 기다리고 싶으세요?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 거의 모든 분들이 음식점에 들어가자마자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파수꾼의 떨리는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수꾼이 얼마나 심장이 쿵쾅거리겠습니까. 사소한 소리에도 예민해져서 심장이 내려앉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지구를 빨리 자전시켜서라도 태양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묘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면서 현재가 아닌 미래를 앞당겨서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다림은 현재에 한 발을 딛고 미래에 다른 한 발을 걸치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맛집 앞에 줄을 서는 순간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합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겠구나하면서 줄서서 친구와 사진도 찍고 메뉴도 고민해 보고 지난번에 왔을 때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경험도 서로 나눕니다. 음식을 먹는 순간만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죠. 파수꾼의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지구나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않는다면 파수꾼은 완전한 절망 가운데 밤을 지새울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은 아침을 기다리며 희망을 가지고 밤을 지새웁니다. 매순간이 두려운 순간이겠지만 그래도 아침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에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현재만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는 빛도 있지만 아직도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에 임하게 해 달라는 주기도문의 기도는 우리는 간절한 기다림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있어야 우리는 현재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그날, 이 세상이 완전한 구원을 받는 그날, 소외받는 모든 자들의 눈물이 멈추는 그날, 고통과 아픔의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는 그날을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다림은 경외로 이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개정)

경외는 참 중요한 단어이지만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경외의 태도로 상대방을 대할 때 복잡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경외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어려운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고 오늘은 기다림과 관련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기다림을 두 가지로 구분을 했습니다. 하나는 즐거운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떨리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삶인데, 이때 즐거움과 떨림, 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만난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예수님의 희생까지도 감수하고 나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고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끼는 분과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즐거움의 감정만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떨리는 감정도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고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몸뻬 바지 같은 것을 입고 열심히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고 또 흙과 거름도 여기저기 묻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그 친구는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었습니다. 친구가 와서 반갑다고 나를 안으려고 다가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물러설 것입니다. 상대방은 너무 말끔하고 상대방에 비해 나는 너무 지저분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시편 130 3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에 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대통령이 정장을 입고 여러분을 만나러 나오실 테니 여러분도 정장을 입고 청와대에 가면 됩니다. 그러면 약간 떨리기는 하겠지만 별 거리낌 없이 대통령을 만나서 악수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어울리는 삶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실천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11] 젊은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겠다… [14]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시편 34:11-14, 새번역)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는 삶입니다. 평화의 삶이 하나님과 어울리는 삶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행동으로도 말로도 폭력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때는 괜찮습니다. 폭력을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극한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돌변하기도 합니다. 내가 해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 내가 손해를 입게 될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들이 종종 있습니다. 가벼운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미국 유학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교회에 가기 싫어도 꼭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저만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내, 저희 아이들도 같이 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엄마 아빠가 교회 가니까 그냥 따라갑니다.그런데 조금 크면서 의문이 생길 수 있죠. ‘나는 왜 교회에 가야 하는가?’라고 말이죠. 그러면 어느 날은 교회에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신은 안 가겠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간에 맞추어 교회에 가야 하고 집에 아이를 혼자 놔둘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점점 촉박해지고 아이는 계속 안 가겠다고 버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죠?

 

폭력을 쓰는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편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찾아왔을 때에 베드로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2-53, 개정)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그 길이다.

평화를 얻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평화의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평화는 올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폭력을 쓰지 마십시오.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도 폭력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해, 자살 시도는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폭력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내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내 것에게 폭력을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집에 애완견이 있다면 그 개는 여러분의 개입니다. 내 개는 내 것입니다. 하지만 내 개에게 폭력을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 몸에게 폭력을 쓰는 얼마나 더 나쁜 일이겠습니까? 파수꾼의 기다림과 같은 극한 상황에 닥쳤을 때 여러분의 떨림과 두려움을 제거하고 평화를 얻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 유혹을 떨쳐버리십시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평화의 방법을 사용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마치는

사랑하는 성화 공동체 가족 여러분,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십시오.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십시오. 힘써서 평화를 찾으십시오. 누구에게도 폭력의 방법을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평화의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