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김소진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1997)_어른이 된다는 것

설왕은 2022. 6. 16. 09:00

제목이 판타지 소설 같습니다.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를 발견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항아리의 요정이 나오지 않을까 예측하며 글을 읽었지만 전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김소진 작가의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화자인 '나'는 어린 시절 항아리를 깬 사건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그리 대단한 추억이 아닙니다. 눈이 쌓여 있던 겨울 어느 날 새벽에 오줌을 누러 갔다가 나오는 중 눈 밑에 있던 빠루를 밟아서 짠지 단지를 깬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 항아리 같은 것 안 깨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큰 사건이죠. 소설 속 나는 깨진 항아리를 숨기기 위해서 눈사람을 만들고 그 안에 검은 항아리를 숨깁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눈사람을 만들어서 깨진 짠지 단지를 숨긴 '나'는 두려운 마음에 가출을 합니다. 그리고 해 질 녘에 돌아오는데요. 이상하게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 나를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엄청난 사고를 저질렀는데도 말이죠.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나'는 오히려 충격을 받습니다. 이 부분이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하고 실제 세계 사이에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푸레한 깨달음에 속한 것이었다.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도 혼내지도 않는 세계가 너무나 괴물스럽고 슬퍼서 싱거운 눈물이라도 흘려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하긴 눈물 서너 방울쯤 짜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난 시래기 줄기가 매달린 처마 밑에 서서 몇 방울 떨구며 소리 없이 울었다. 차라리 그 깨진 단지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혼은 나더라도 나는 혼돈스럽지도 불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혼나지 않았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소설 속 '나'는 혼돈스러워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성장 소설이라고도 합니다. 어릴 때는 세상의 중심이 '나 자신'인데 크면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사회화된다고 할까요? '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소설에 따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 순간 상당히 낯선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낯선 일이기도 하죠. 

 

그래서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제가 어른이 불과 몇 년 전에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집에서는 몰랐는데 밖에 나가서 옷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옷이 심하게 구겨져 있다든가 이상한 이물질이 묻어 있다는가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아내가 발견하고 제게 말해 주면 제가 그렇게 말해죠. "괜찮아요. 아무도 나를 유심히 안 봐요." 내가 나를 주목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것이 좋은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어린아이였다가 당연히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 느낌이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재개발이 이루어질 동네에 가서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아, 하지만 여태껏 나를 지탱해 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 온 육체인 이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이렇게 감상적으로 만드는 게. 이 동네가 포크레인의 날카로운 삽질에 깎여 가면 내 허약한 기억도 송두리째 퍼내어질 것이다. 

 

제가 매우 점잖게 이 소설에 대해 썼지만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인간의 생리 현상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가 아주 찰진 작품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오줌을 갈기고 똥을 누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쾌와 유쾌의 감정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중요한 사건이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기죠.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저도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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