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 2년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철학과 문예학을 전공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츠바이크는 시와 소설을 써서 명성을 얻었고, 저명한 사람들에 대한 뛰어난 전기를 쓰기도 했다. 그는 1938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이민 갔고, 1940년에는 미국으로, 1942년에는 브라질에 살게 되었다. 그는 브라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츠바이크는 브라질에서 동료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장 무의미한 파괴가 벌어지고 있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숨을 쉬고 자고 먹을 수 있겠습니까? 창작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장 악의적인 파괴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뭔가를 만들 수 있겠어요!"
지구상에 가장 진화된 생명체라고 불리는 인간이 특별한 이유 없이 다른 인간을 미워하고 괴롭히고 죽이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츠바이크와 같은 양심 있는 지식인이라면 그와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설득하기도 했을 것이고 나치가 행하고 있는 대규모 학살과 폭력에 저항하는 글을 언론사에 기고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이성과 문학의 힘을 믿었으나 나치의 무력 앞에서 그가 믿었던 것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츠바이크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아마 절망감도 있었겠지만 어떻게든 인류의 크나큰 과오를 책임을 지려는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가장 포악했던 시기에 츠바이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한 글을 썼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은 그의 마지막 지혜를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책은 아홉 개의 에세이를 담고 있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
나에게 돈이란
센강의 낚시꾼
영원한 교훈
알폰소 에르넨데스 카타를 위한 추도사
거대한 침묵
이 어두운 시절에
하르트로트와 히틀러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글은 첫 번째 글이었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에서 츠바이크는 동네에 살고 있는 어떤 젊은이를 소개한다. 츠바이크는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인 돈을 주체적으로 피하는 기술, 그리고 단 한 명의 적도 만들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기술, 매우 어려운 이 두 가지 기술을 내게 보여준 사람이 있다. 그를 잊는다면, 그것은 배은망덕일 것이다. 나는 이 귀한 기술을 습득하려 노력했지만 고백하자면 두 가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9)
안톤이라는 젊은이는 츠바이크가 살고 있던 동네에 떠도는 사람이었다. 안톤은 정확히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지만 필요할 때는 언제나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도왔지만 자신이 한 일만큼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돈을 받았다. 안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츠바이크는 그의 삶의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아서 글로 남긴 것이다. 나는 이 글 때문에 이 책이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안톤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츠바이크가 만났다니까 실제로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글쎄 난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츠바이크가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돈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말이다. 하지마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까? 츠바이크의 이 글을 읽어 본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정말 이런 사람이 츠바이크의 이웃으로 살고 있었다고 믿는지 말이다.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라는 다음 글도 울림이 있었다. 츠바이크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촉망받는 학생이었던 그의 친구는 아버지의 금융 범죄로 인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고상하고 우수한 학생이었던 그의 삶은 완전히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이 글에서 츠바이크는 그때 그 친구에게 말을 걸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
그 중요한 순간에 그를 저버리고 만 것은 공감 부족이나 무관심, 못된 의도가 아니었다. 가장 필요할 때 올바른 말을 못하게 막는 것은 많은 경우 용기 부족인 것 같다. (32-33)

츠바이크는 스스로에게 용기가 필요하다고 계속 독려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 말은 고등학생이었던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은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 아마도 폭력에 중독되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오스트리아는 독일과는 다른 나라지만 똑같이 독일어를 쓰고 있는 나라다. 당연히 츠바이크는 독일어로 글을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치에 부역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폭력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폭력의 불씨가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츠바이크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계속 되뇌었을 것 같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센 강의 낚시꾼'이라는 글도 생각해 볼 만한 글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서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순간에 그 근처 센강에서 수많은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는 글을 읽으며 츠바이크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을 품는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츠바이크는 여기에 적절한 답변을 찾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전쟁 첫해 말에 우리가 더는 전쟁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우리가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작은 심장 하나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역사적 시대'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고, 우리의 마음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잠시 떠나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선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56-57)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한데 자기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루이 16세가 처형될 때 센강의 낚시꾼들이 문제가 아니라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변명이다. 그냥 인간의 심장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큰 일들이 쉴새없이 터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다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츠바이크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작은 심장을 가지고 있어서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좀 편하게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100년 후에 인류는 21세기 초반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만약 기후 변화로 인해서 인류과 지구의 생명체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그나마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시기가 아마 21세기 초반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지구는 지금 벼랑 끝을 향해서 달려가는 기차와 같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가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은 심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정말 비겁한 변명일 것 같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또는 이 세상의 지속을 원한다면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을 들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질문 세 가지
1. '안톤'의 삶은 고결한 지향점인가, 현실 도피인가?
츠바이크는 돈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과 친구로 지내는 '안톤'에게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토론 질문: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톤처럼 '필요한 만큼만 받고, 적을 만들지 않는 삶'은 정말 가능한 모델일까요? 아니면 츠바이크가 나치의 광기(거대한 악)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만들어낸, 혹은 투사한 '이상향'에 불과할까요?
2. '용기 부족'과 '공감 부족' 중 무엇이 더 치명적인가?
츠바이크는 친구의 불행 앞에서 입을 떼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그것이 무관심이 아니라 '용기 부족'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나치 시대의 대중 역시 폭력이 두려워 침묵했을 것입니다.
토론 질문: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 앞에서 우리가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 '방법을 몰라서'나 '관심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불이익을 감수할 용기가 없어서'일까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은 '공감'에 머물러야 할까요,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로 나아가야 할까요?
3. '작은 심장'은 정당한 방어기제인가, 비겁한 변명인가?
츠바이크는 센강의 낚시꾼들을 언급하며 인간의 심장이 너무 작아 거대한 불행을 다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기후 위기나 전쟁 같은 현대의 거대 담론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토론 질문: 거대한 시대적 파도 앞에서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는 행위(낚시를 하는 것)를 '생존을 위한 본능적 방어'로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역사에 대한 직무유기'로 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츠바이크처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도 이 '작은 심장'을 긍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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