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래트 피트 주연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재밌는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를 점점 먹어서 늙어서 죽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면 병이 들고 젊은 시절의 반짝반짝한 광채를 잃어간다. 꼭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그 법칙이 인간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비처럼 가장 화려한 형태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사람이 늙는 것이 아니라 점점 젊어지다가 죽는 것은 어떨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그와 같이 인간이 나이 먹는 방식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이 영화가 감독의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원작이 있었다. 바로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의 소설이다.
이 글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대한 리뷰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 옛적, 1860년엔 사람이 집에서 태어나는 게 지당한 일이었다. 듣자 하니, 지금은 높으신 의학의 신들께서 어린애의 첫번째 울음소리는 병원, 그것도 이왕이면 상류층 병원의 마취제 향 가득한 공기 속에서 울리게 하라고 선포하셨단다. 그러니 1860년 어느 여름날, 젊은 로저 버튼 부부가 첫아이를 병원에서 낳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들은 유행을 오십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행동이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놀라운 이야기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절대 알 수 없을 터이다. 나는 그저 일어난 일만 이야기하고, 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기겠다.
여기서 벤자민 버튼이 태어난다. 피츠제럴드는 노인으로 태어난 벤자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설명하지 않는다. 노인으로 태어났지만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 벤자민은 말도 하고 자신이 노인인 것도 알고 있다.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고 있고 아버지가 자기보다 더 젊기 때문에 그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것에 대해서 어색해하기도 한다.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노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구체적인 설정은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노인이 태어나서 점점 젊어지다가 결국 생을 마감하는 기묘한 이야기를 구성해 보는 것이다.
만약에 정말 노인으로 태어나서 신생아로 죽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그 사람은 일종의 병을 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치료될 수 없는 불치병이다. 그렇다면 벤자민을 노인으로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벤자민의 아빠인 로저 버튼은 벤자민이 노인이지만 아이처럼 행동하기를 바라고 아이처럼 보이기를 바란다. 나이는 어리지만 노인으로 살고 있는 벤자민도 자신의 삶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주변에 있는 인물들도 벤자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는 그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자신과 닮은 손자가 자기와 나이도 비슷하다는 사실에 반감을 가졌으나 육체적 나이가 비슷하자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벤자민도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다.

이 소설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여자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벤자민이 노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장 곤혹스러울 사람은 바로 벤자민의 엄마다. 하지만 엄마는 등장하지 않는다. 벤자민을 걱정하고 구박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은 아빠지, 엄마가 아니다. 엄마는 벤자민에게 다르게 대했을 것 같은데 엄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나오는 여성이 벤자민이 첫눈에 반한 힐더가드라는 여성이다. 벤자민의 신체 나이가 쉰 정도 되었을 때 이제 스무 살 정도 되는 힐더가드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더니 있을 수 없이 아름다운 젊은 숙녀가 하나 더 내렸다. 벤자민은 전율했다. 몸에서 거의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 몸의 분자들을 분해하고 재조합하는 것만 같았다. 몸이 한순간 굳어지더니 뺨과 이마로 피가 확 솟구쳤고, 귀에서는 계속해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첫사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힐더가드는 나이 든 남자를 좋아했다. 그래서 결국 벤자민은 힐더가드와 결혼에 성공한다. 벤자민과 힐더가드는 아들을 낳고 로스코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이 소설은 이렇게 계속 남자들이 나온다. 딸을 낳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들을 낳고, 딸도 낳았는지 낳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이 소설은 남자들의 이야기다. 분명히 벤자민과 힐더가드의 결혼 생활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그에 대해서 별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결혼 후 15년이 지나자 벤자민은 더 젊어지고 힐더가드는 서른 다섯 살이 된다. 벤자민은 더 이상 아내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언급하며 힐더가드도 거의 무대 밖으로 밀려난다. 왜 이 소설을 남자들의 소설로 지은 걸까?
그리고 또 흥미로운 점이 있다. 사람들이 벤자민을 계속 구박한다는 점이다. 로저는 벤자민이 나이 든 아이라는 것에 대해서 구박한다. 벤자민이 계속 젊어지자 그의 아내 힐더가드는 젊어지는 것을 그만 멈추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스스로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힐더가드는 할 수 있다고 계속 멈출 것을 강요한다. 벤자민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로스코는 자신의 아버지가 계속 젊어지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게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한다. 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노인이 젊어지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로스코 세대의 표현을 쓰자면, 그는 그 문제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예순 살로 보이길 거부한다는 점에서 "원기왕성하고 사내다운 아내"(이건 로스코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었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실로 삼십 분만 이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그는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가곤 했다. 로스코는 '활동가'들은 젊게 살아야 한다고 믿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실천하다니, 그런 건 비효율적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젊게 살아야 하고 나이 든 사람들을 나이 들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틀리지 않은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젊어지는 벤자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게 자기의 의지로 조정할 수도 없는데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옳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비난한다. 마치 벤자민이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이 자신의 책임인양 말이다.

벤자민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간다. 나이든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벤자민은 언제 죽을지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점점 더 어려지다가 엄마뱃속에 들어갈 정도의 아기가 되는 순간 벤자민은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억을 잃어간다. 나이가 든 사람도 기억력이 감퇴하지만 아기의 기억력은 그것보다 더 좋지 않다. 아기였을 때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아기는 기억력이 약하다. 벤자민도 점점 더 기억력을 잃는다.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마지막 식사 때 우유가 따뜻했는지 차가웠는지,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요람과 나나의 익숙한 모습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배고프면 울었고, 그게 다였다. 낮과 밤 내내 숨을 쉬었고, 그의 위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웅얼거리는 소리들, 희미하게 구분되는 냄새들, 빛과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깜깜해졌다. 하얀 요람과 그 위에서 움직이던 희미한 얼굴들, 우유의 따스하고 달콤한 향기가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기억은 사람에게 축복일까, 아닐까? 내가 살아온 삶을 기억하고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나 자신이라고 여길 정도로 중요한 것 같다. 기억이 사라진 나는 과연 나일까? 기억을 잃는다면 나는 나의 겉모양과 하고 있을 뿐 내가 아닌 것이 아닐까? 하지만 벤자민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그 생각이 옳은지 잘 모르겠다. 배고프면 울고, 숨을 쉬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빛과 어둠을 느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들이 꺼지는 것. 모든 기억을 잃고 희미한 감각만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깜깜해지는 죽음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죽는다는 것조차 모르게 죽는 게 어쩌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모조리 다 기억한 상태로 죽는다는 것이 오히려 더 슬플 것 같다. 아기와 같이 희미하게 삶을 누리고 경험이 머릿속에 축적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삶은 충분히 따스하고 달콤한 것 아닐까? 기억이 먼저 꺼지고 그 다음에 감각이 꺼진다면, 삶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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