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단편소설

[세계단편소설] 이반 투르게네프 "밀회"_사건보다는 배경

설왕은 2022. 9. 13. 20:39

'밀회'는 러시아 최고의 문장가라는 불리는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단편 소설이다. 러시아 최고의 문장가라는데 왜 나는 모르고 있었을까? 투르게네프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언어를 배웠다. 특이하게도 투르게네프는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이후에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아마 처음에는 작가보다는 교수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1850년에 고골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썼다가 정부 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투르게네프의 작가적 명성은 더 높아졌다. 

 

자작나무 숲

 

'밀회'를 처음 읽었을 때는 '뭐,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주인공인 '내'가 숲 속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는데 어떤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것을 엿듣게 되는 이야기이다. 대단한 비밀을 가진 대화가 아니고 음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매달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결국 아쿠리나라는 여자는 떠나가는 남자를 쫓아가다가 넘어지는데 그때 '나'는 아쿠리나에게 다가가서 도우려고 했지만 아쿠리나를 비명을 지르면서 숲 속으로 숨어버린다. '나'는 아쿠리나가 버리고 간 꽃다발을 주워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계속 아쿠리나를 떠올린다. 

 

그러나 투르게네프가 러시아 최고의 문장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는 그의 문장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서 작품을 읽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는 장면과 대화보다는 숲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품에서 일어나는 사건보다 작품의 배경 설명이 더 눈에 띄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주위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만 들어도 계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즐거운 듯 속삭이는 봄의 재잘거림도 아니고, 수다를 떠는 듯한 여름의 목소리도 아니며, 늦가을의 싸늘한 외침도 아니었다. 그것은 들릴락 말락 한, 마치 꿈속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런 식으로 투르게네프의 숲에 대한 묘사는 매우 훌륭하다. 숲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서 그런지 남녀 간의 대화가 더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숲은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천박한 성품을 가진 듯한 남자가 그를 사랑하는 여자를 무시하고 떠나는 장면은 대비가 된다. 숲을 묘사하는 문장은 깊고 아름다운데 남자와 여자 사이의 대화는 얕고 짜증이 난다. 주인공인 '나'는 남자의 태도와 말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며 아쿠리나를 불쌍하게 여긴다. 아쿠리나가 남자를 쫓아가다가 넘어지자 주인공인 '나'는 나타나서 도와주려고 한다. 이런 시도도 사실 매우 어색했다. 내가 아쿠리나였어도 당연히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가 모르는 남자가 나타났다면 어느 누가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시들어 가는 대자연의 서글픈 미소 뒤로 우울한 겨울의 공포가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겁 많은 까마귀 한 마리가 요란스럽게 날개를 파닥이면서 머리 위로 날아갔다. 

 

이와 같이 투르게네프는 소설의 마지막을 아름다운 배경 묘사로 끝마친다. 보통 소설은 사건을 중심적으로 읽게 마련이다. 소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을 가지고 그 이야기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아닌 것 같다. 제목은 '밀회'라서 무엇인가 비밀스러운 만남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니고 남녀 사이에 헤어지는 대화치고는 그다지 극적이지 않다. 갈등이나 긴장도 별로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헤어지는 사건 이전과 이후에 작가가 묘사하는 배경 설명은 매우 뛰어나다. 사건보다는 배경이 더 돋보이는 작품인 것 같다. 

 

*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나'는 자작나무는 좋아하는데 사시나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시나무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으로 봐서는 사시나무를 싫다고 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사시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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