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책]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1975)_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설왕은 2023. 1. 27. 22:01

저자를 알지도 못했고 제목도 처음 들어 본 책이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낡은 책은 내 손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 그래서 책을 들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초반에 거부감 없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책은 프랑스 소설이 아닌가.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금방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작가의 재주이다. 아마도 소설 속 주인공 화자가 10대의 소년이라서 그의 말이 어렵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던 것 같다. 그리고 소설 속 '나'는 10대 일지 모르나 작가는 훨씬 더 나이가 든 사람이기 때문에 10대의 말투를 가진 아저씨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말은 쉽고 말에 담긴 뜻은 깊었다. 

 

 

"자기 앞의 생"은 매춘부의 아이도 태어난 모하메드라는 아이가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로자 아줌마도 전직 매춘부였으나 이제 나이가 들어서 현역에서 은퇴하고 매춘부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이야기는 로자 아줌마가 죽으면서 끝난다.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소재가 독특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전직 매춘부가 돌보는 매춘부 아이의 이야기라. 이보다 더 독특한 소재를 찾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소설의 화자는 모모 또는 모하메드라고 하는 아이지만, 내가 볼 때 주인공은 로자 아줌마인 것 같다. 단지 소재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나는 소설을 볼 때 작가가 세상에 대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읽는 편인데 내 철학은 무엇이다라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작가의 철학은 문장에 묻어 나오기 마련이다.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소설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물론 이들의 처지 자체가 워낙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체로 다 거친 느낌으로 묘사되고 말도 곱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처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동정해서 사랑하는 느낌은 없다. 모모가 묘사하는 로자 아줌마는 그리 사랑스러운 인물은 아니다. 모모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아끼고 사랑한다. 모모의 사랑이 동정심 어린 사랑이 아니라 그냥 사랑으로 보여서 좋았다. 하긴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엄마에게 버림받고 살고 있는 모모가 누구를 동정할 처지가 되지도 못한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 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로자 아줌마는 육중한 몸뚱이를 오로지 두 다리로 지탱하여 매일 칠 층까지 오르내려야 했다. 그녀는 유태인이라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불평한 처지가 못 되지만, 그래도 칠 층을 오르내리는 일만은 정말 힘에 부친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녀는 다른 일들로 심신이 괴로운데다가 건강도 별로 좋지 않았다. 또 하나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그녀가 엘리베이터 하나쯤은 갖추어진 아파트에서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라는 점이다. (9)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 층에서 산다는 상황 자체가 로자 아줌마와 모모 그리고 아이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려 주고 있다. 첫 단락부터 모모는 로자 아줌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로자 아줌마에 대한 모모의 애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볼품 사나워진 전직 매춘부를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대할 수 있을까? 예의 바르게 대할 수는 있어도 애정을 가지고 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진짜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이 좋은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랑이 필요한데 어떤 사람은 정말 사랑하기 힘든 존재일 수 있다. 그래도 그 사람도 사랑받아야 하는데 모모가 훌륭하게 그 일을 해 내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고 믿음직스러웠다.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 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164)

 

이런 식으로 작가는 신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신에 대한 불만이 한두 군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계속 나온다. 누군가 나를 비난할 때 그 비난은 얼토당토 하지 않을 때는 웬 헛소리인가 하고 넘겨버릴 테지만 그 비난이 정곡을 찌르면 무척 아프다. 신에 대한 모모의 비난은, 만약에 신이 들었다면 매우 아팠을 말이다. 비난이라기보다는 그냥 사실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뼈를 때리는 사실이다. 신은 모모의 말에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로자 아줌마는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에게 친절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165)

 

 

슬픈 구절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뒤집어서 해석해 보면 그동안 사람들은 로자 아줌마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친절이 로자 아줌마에게는 나쁜 징조가 된다는 것, 평생 동안 그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있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252)

 

책을 읽는 내내 제목에 대해서 문득문득 궁금했다. 왜 "자기 앞의 생"일까? 여기서 자기는 누구이며 자기 앞에 있는 생은 누구일까? 자기는 모모이고 자기 앞의 생은 로자 아줌마일까? 잘 모르겠다. 그런데 모모는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로자 아줌마에게 생은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로자 아줌마도 모모도 모두 똥 같은 사람들이니까.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피하는 똥 같은 사람들에게 생은 주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모모는 로자 아줌마 곁을 지키려고 한다. 왜 생이 주어지지 않았는지 왜 사람들이 다 로자 아줌마를 피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모모는 한 가지만 생각한다. 그녀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것.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296)

 

 

에밀 아자르는 예수가 가장 아픈 죽음을 당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누가 예수 앞에서 자신의 죽음이 더 아픈 죽음이었다고 도전장을 내밀 수 있을까? 아자르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십칠 년을 매달려 있었으니까. 이런 식의 이해가 반갑다.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 삶은 늘 연장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식물인간이나 로자 아줌마 같은 사람에게는 깨어나고 싶은 악몽 같은 것일 테니까. 에밀 아자르는 작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데 60세쯤에 출간이 이 소설에서 어떻게 이렇게 소외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하지만 이 집 아이들이 조르니 당분간은 함께 있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307)

 

 

이 더럽고도 거친 소설에 박수를 보낸다. '사랑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주장으로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하나도 고리타분하지가 않다. 에밀 아자르가 어떤 사람인지 매우 궁금해졌다. 그의 본명이 로맹 가리이고 평론가들의 극심한 비판을 피해서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로맹 가리는 자신의 조카에게 에밀 아자르 연기를 부탁했다는 것도. "자기 앞의 생"은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받았는데, 정말 받을 만한 작품이다. 좋은 작품을 볼 줄 아는 프랑스 평론가들은 왜 로맹 가리가 작품을 낼 때마다 심하게 비판해서 그가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내야 했을까? 이 작품 때문에 다른 프랑스 소설들도 읽고 싶어졌다. 

 


남겨 놓고 싶은 문장들

로자 아줌마 얘기로는,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여자들은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다고 했다. 포주들이 제대로 일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그런 여자들에게는 삶의 의의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아이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종종 시간 여유가 생기거나 몸이 아플 때면 돌아와서 자기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떠나콘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끼치지 않는데 왜 창녀로 등록된 여자들이 자녀를 키울 수 없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30)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자신뿐이란다. 하지만 너는 참 좋은 아이야. 네 아빠는 알제리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렴. 그건 훌륭한 일이란다. 독립의 영웅이지.” (46-47)

 

맡긴 아이를 만나러 오는 여자들도 한둘 있었다. 그 여자들은 아이를 데리고 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가든가 외식을 나갔다. 장담하건대, 몸 파는 여자들도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 손님들은 매번 바뀌지만, 아이들은 그녀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57)

 

"모모야,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내겐 아무도 없다니까요. 난 자유예요." (90)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다. (141)

 

누구도 내게 와서 자기가 아버지라고 내세울 수 없는 것 아닌가. 빌어먹을. 나는 만인의 법률에 따라 보장된 아버지가 없는 아이였다. (215)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