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_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설왕은 2019. 12. 5. 09:15

"메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 작가(1907~1942)가 1936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세 사람의 장돌뱅이가 강원도 봉평에서 대화로 건너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을 서술한 단편 소설입니다. 원제는 "모밀꽃 필 무렵"입니다.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 출생이지만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을 다니는 등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작품을 보면 향토적인 정서를 물씬 풍기고 있어서 작가가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았을 것 같지만 이효석은 서구 문화를 매우 즐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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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줄거리를 아는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소설에서 느껴야 하는 것은 분위기입니다. 달빛이 비치는 메밀꽃 밭을 가로질러 나귀를 타고 산을 넘는 세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인연의 끈을 한 번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1936년 작품이어서 그런지 술술 읽히지는 않습니다. 생소한 단어도 많이 있고, 시골 장돌뱅이가 쓰는 말투도 낯설어서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지 감이 잘 안 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래에 인용한 부분은 읽으면 읽을수록 이 장면이 머릿속에서 살아납니다. 한 편의 시와 같습니다.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제 눈에 들어온 단어는 '흐뭇'이라는 단어입니다. 봉평 장에서 장사를 접고 대화 장으로 가는 조 선달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 본 일 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흐뭇하기를 바라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달이 흐뭇하게 빛을 흘리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고 가는 것이 바로 '달'입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을 보면 '붉은 대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붉은 대궁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찾아보았습니다. 대궁은 '대'의 강원도 사투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붉은 대궁'은 그냥 '붉은 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메밀대는 위의 사진에서 보면 메밀꽃의 대궁은 그냥 풀색인데요. 이효석이 보았던 혹은 기억했던 메밀대는 붉은색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연서 화백이 그린 메밀꽃을 보면 메밀대가 붉은색입니다.

메밀대가 붉은 색인 종류가 있든가 아니면 어떤 시기가 되면 메밀대가 붉은색이 되든가 둘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메밀 대가 붉은빛을 띠고 있습니다. 붉은 대궁에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 밭에 달이 뜨고 나귀가 방울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풍경은 정말 인상적일 것 같습니다. 

 

 

허 생원은 결혼도 하지 못하고 벌어놓은 돈도 없어서 꽤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기저기 장을 떠돌면서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불쌍한 것 같은데요. 그런데도 그의 삶이 아주 쓸쓸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닐기도 하고, 그의 곁을 지켜주고 그의 손길에 격하게 반응해 주는 나귀도 한 마리 있습니다.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혈육일지도 모르는 동이와 잠시나마 동행하며 따뜻함도 느낍니다. 또한 그는 오래전에 정을 통했던 한 여인과의 사랑의 추억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즐거운 기억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효석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에 명을 달리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지식인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허 생원의 삶이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이, 이효석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이효석이 아무리 뛰어난 소설가라고 하더라도 일제 강점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없었을 테고, 그만한 대우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삶을 긍정하는 허 생원처럼 이효석도 그런 삶의 자세를 가졌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 참고로 해마다 9월이 되면 강원도 봉평에서 메밀꽃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내년부터는 9월이 되면 메밀꽃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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