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박완서 "그 여자네 집"_세상에 사랑은 있는 거야

설왕은 2019. 12. 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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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 알고 있는 아픈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으면 들을 때마다 아픈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박완서 작가의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제가 아는 그 아픈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해서 들려줄까 봐 겁이 났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여서 잊으면 안 되지만 역사를 잊으면 안 되지만 소설에서는 적어도 소설에서는 꼭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누군가는 기적 같이 살아날 수도 있고 위기를 피할 수도 있고 나쁜 놈들을 혼내 줄 수도 있잖아요. 꼭 그러기를 바라며 「그 여자네 집」을 읽었습니다.

 

박완서의 "그 여자네 집"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만득이와 곱단이의 사랑 이야기가 주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1990년대까지 이어집니다. 일제 치하라는 암울한 시대 배경이지만 초반에는 만득이와 곱단이의 꽁냥꽁냥한 연애담으로 전혀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습니다. 첫사랑의 풋풋한 설렘의 감정이 물씬 느껴지는 러브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응원하고 보호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만득이와 곱단이가 서로를 아껴 주고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암울한 현실로 인해서 그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결국 뜻하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됩니다. 만득이는 강제 징집되어 일본을 위해 싸워야 하는 전쟁에 끌려 나갑니다. 곱단이는 위안부로 끌려갈 위험에 처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심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아픈 과거지만 다시 들어도 아프고, 잠시나마 나도 흐뭇하게 보면서 응원했던 두 연인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저에게 그런 심한 거부감이 들 정도로 박완서 작가는 두 사람의 사랑의 감정과 그들의 아기자기한 사랑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단 제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다행하게도 만득이는 살아서 돌아오고 곱단이도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곱단이는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신의주로 갑니다. 만득이도 같은 마을에 사는 순애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죠. 거기까지도 비극인데요. 한국 전쟁으로 한반도의 허리가 잘라지게 되어 만득이와 곱단이는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는 곱단이의 심정에 대해서는 작가는 한 단락을 할애합니다. 하지만 만득이에 대해서는 그냥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결혼한 것처럼 특별한 부가 설명이 없습니다. 어쩌겠어요, 이미 곱단이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멀리멀리 떠나버렸는걸요. 

 

소설의 마지막에 만득이의 고백이 나옵니다. 만득이는 결혼한 후 곱단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고백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의 화자도 만득이의 아내 순애도 그리고 만득이와 곱단이의 사랑을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만득이와 곱단이는 서로를 잊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토록 아름다운 사랑이 어떻게 잊힐 수 있겠냐고, 우리도 잊지 못하는데 당사자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이죠. 저도 공감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두 사람의 사랑만일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사랑을 보며 흐뭇이 응원하고, 저런 사랑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야, 하고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한 행복감으로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우리의 삶을 채웠던 우리를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못했지만 너는 지켜야지, 하는 이런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인가요? 세상에는 사랑이 있는 거잖아요. 

 

삶의 순간순간은 그냥 지나가잖아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냥 스치듯 지나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그 순간들을 음미해 보면 가슴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어요. 사랑이 시작할 때가 그렇죠. 사춘기를 지나면서 한 명의 독립된 개인으로 스스로 인지하게 되는데요. 또 비슷한 순간에 나에게 손을 내미는 한 여자, 혹은 한 남자가 있고 그 손을 잡았을 때의 짜릿한 그 느낌이 있잖아요. 사랑이 처음이라 모든 것이 어색하고 어설퍼서 그 당시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습까지도 참 사랑스러운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사랑을 시작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오죠. "좋을 때다!" 그런데 사실 많은 사람들도 그 좋은 때가 있었죠. 그리고 사랑은 지켜져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바람인 것 같아요. 우리가 직접 실천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지금도 그런 사랑을 하고 그런 사랑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 세상이에요. 

 

이 소설은 1998년에 나온 작품입니다. 박완서 작가가 수필 형태로 쓴 소설입니다. 마치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적은 것처럼 쓰는 방식을 택해서 사실감을 더하고 있지요. 만득이와 곱단이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발단이 되는 것은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인데요. 이 시도 정말 아름답습니다.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크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이 장면이 머릿속에서 동영상으로 그려집니다. 마치 내가 그 여자네 집을 엿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죠. 세상은 아름다운 거예요. 그렇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해요. 

 

박완서 작가(1931-2011)의 「그 여자네 집」(1998, 창작과 비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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