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김인숙 "빈집"_남편의 이중생활

설왕은 2019. 12. 6.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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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고 1983년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상실의 계절'이 당선되어 등단하고 활동을 한 작가입니다. 저는 '빈집'이라는 작품을 통해 김인숙 작가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설을 즐겨 읽었던 사람이 아니었는지라 소설가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아주 유명한 작가나 중고등학교 시절에 교과서에서 보았던 소설가 정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소설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떤 작가의 작품이 좋은지 탐색을 하게 되었죠. 잘 알려져 있는 작가들의 작품도 읽어 보고 싶기는 한데 박경리의 토지 같은 작품이요. 그런데 너무 길어서 일단 엄두가 안 났습니다. 저는 200에서 300쪽 정도 되는 장편 소설을 읽고 싶은데 어떤 작품이 좋은지 어떤 작가가 좋은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일단 단편을 읽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의 여덟 번째 책 '나와 너'에서 김인숙 작가의 '빈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빈집은 2012년에 황순원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빈집은 결혼한 지 27년 된 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요. 글이 뭐랄까.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착착 착착 돌아갑니다. 간결한 문장으로 앞뒤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눈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말고 문득 놀라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내가 아직도 이 남자랑 살고 있네.

그다음날 아침의 기분은 더 경이로웠다. 

이십오 년 하고도 하루를 더 살았어, 내가 이 남자랑."

 

익숙한 말투인데 군더더기가 없고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합니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재미가 있어요, 재미가. 별것 아닌 것에 놀라는 감정을 흥미롭게 전달하는 작가의 재능이 돋보입니다.

 

결혼한 지 27년이 된 한 여인의 평범한 이야기이고 그녀의 남편도 대단할 것 없는 오히려 대한민국 평균보다 조금 못한 정도의 남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다 보면 그 남자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저도 읽다가 어, 이 남자 뭐지? 궁금한데, 하며 이 남자가 가지고 있는 평범해 보이지만 이 남자 안에서 고요하지만 강력하게 타오르게 있는 듯한 생명의 불꽃같은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달랐다. 마치 안 웃으면 끝장이라는 듯이 그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고 들어내리면서도,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미소를 짓고 또 지었다." 

 

 

여인은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7년 정도 된 부부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화가 나면 나올 수도 있을 법한 말을 남편에게 뱉어 냅니다. "병신 아냐."라고 말을 했다가도 이 여인은 그런 남편과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이 한심해집니다. 

 

"이유도 없이 자꾸 웃는 대머리 아저씨는 미친년처럼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는 아줌마와 살고 있고, 그 아줌마는 또 그 아저씨와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남편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경멸하기도 하고 특별할 것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던 이 여인은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습니다. 마치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읽던 추리 소설에서 범인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녀는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 결론이 나오고 이 글은 끝날 것 같았는데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평범한 소설에는 판타지가 있습니다. 마치 마블의 영화처럼 영화가 끝난 다음에 나오는 쿠키 영상 같은 것이 소설에 등장합니다. 평범한 이야기가 갑자기 판타지로 바뀌는데요. 솔직히 약간 어색합니다. 앞부분에 평범한 일상을 그릴 때 작가의 글은 물 흐르듯 술술 내려갑니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의 판타지 부분은 작가의 상상이 추상적이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글이 매우 독특하고 판타지 요소가 있지만 그것이 억지스럽거나 요상한 것이 아니라 매우 그럴듯합니다. 정말 정말 소설 속 남편의 숨겨진 삶은 그랬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글을 구성이 좋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아내가 왜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지 남편이 영천 집은 왜 물려받았는지 그 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댕댕이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그냥 대충 나온 문장도 없고 대충 나온 인물도 없고 대충 나온 개도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 기분입니다. 제목이 '빈집'인데 빈틈없이 돌아가요. 

 

저는 이런 소설이 좋아요. 일상생활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평범한 것 같지만 그 안에 비범함이 담겨 있고 절망하는 것 같지만 눈이 부시도록 강력한 희망의 불꽃이 고요하고 타고 있는 이런 소설이 좋아요.

 

결혼한 지 10년 이상 된 아내분들에게 추천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내를 둔 남편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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