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단편소설

[세계단편소설] 안톤 체호프 "사랑에 대하여"_사랑해서 좋았네

설왕은 2020. 12. 17. 16:49

며칠 전에 방구석1열을 통해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감상했다. 방구석1열에서 두 편의 영화를 소개했는데 한 편이 화양연화였고 다른 한 편은 영웅본색이었다. 볼 때는 유명한 홍콩 영화 두 편을 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돌이켜 보니 화양연화와 영웅본색을 나란히 놓고 소개를 하다니 참 안 어울리는 한 쌍이었던 듯. 어쨌든 덕분에 나는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처음 알게 되었다. 2000년에 개봉한 화양연화는 꽤나 유명했던 영화였는데 내가 몰랐던 이유는 그냥 내가 어려서였을 것이다. 거기에 나온 남자주인공인 양조위는 40대의 아저씨인데 그 아저씨가 느꼈을 감정을 영화가 나왔을 당시에 20대였던 내가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제 양조위의 나이가 되었고 방구석1열을 통해 본 화양연화의 양조위는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몰입할 수 있었다. 

 

 

화양연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이다. 화양연화의 정확한 뜻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는 뜻이라나. 그러나 남자주인공 양조위(극중 주모운)와 여자주인공 장만옥(극중 소려진)은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서로를 알게 되고, 결국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행복했고 또 동시에 불행했다. 결국 그들은 헤어진다. 덕분에 아슬아슬한 불안감 속에 사랑을 주고 받던 그들의 불행은 끝났지만, 그들의 사랑이 불러올 수 있었던 어두운 그림자조차도 감수하고 싶을 정도록 그들을 흔들어댔던 사랑의 행복도 끝이 난다. 조마조마한 그 사랑의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두 사람은 그렇게 추억할 수도 있기에 제목이 "화양연화"였을 것이다. 

 

안톤 체호프 (1860-1904)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대하여"도 화양연화와 비슷한 이야기이다. 이것 역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다. 남자주인공인 알료힌은 유부녀인 안나와 사랑에 빠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알료힌은 총각이었다. 둘 다 배우자가 있는 상황보다는 나을 듯. 안나는 지방 법원 차장인 루가노비치의 아내인데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 정도 났다. 알료힌은 루가노비치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들어서서 안나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푹 빠져 버린다. 루가노비치와 안나 모두 알료힌에게 친절한 환대를 베풀었고 알료힌은 안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루나노비치의 집에 자주 들르게 되었다. 루가노비치는 친절을 베푼 것이었지만 안나와 알료힌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있었고 두 사람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감정을 말로써 확인하지는 않는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고 또한 선을 넘는 신체적 접촉은 없었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이별하는 날, 더 이상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순간에 두 사람은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마지막 포옹과 가벼운 입맞춤을 끝으로 그들은 헤어진다. 알료힌은 그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가슴속의 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하찮고 거짓된 것들이었음을 말입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는 일반적 통념에서의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을 떠나 그보다 더 높고 이상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 제가 깨달은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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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힌과 안나가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안나가 루가노비치와 이혼하고 알료힌과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안나가 루가노비치와 결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안정적인 삶과 그녀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로 인해 가능했던 품위와 교양은 그녀의 결혼이 깨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사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는 말은 너무 순진한 말이다. 안나가 알료힌과의 사랑을 선택하는 순간, 그 사랑의 행복을 앗아가버릴 사건들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패로 끝난 그 둘의 불륜은 불행이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어쩌면 알료힌도 주모운도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을 신비로운 순간으로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하고 같이 살아야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닐 수도 있다. "화양연화"와 "사랑에 대하여"에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꼭 결혼하고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알료힌과 안나는 서로 사랑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로부터 봄날의 햇살보다 따뜻한 시선을 받고, 두고두고 잔향이 남는 가슴 설레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사랑이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엄마, 아빠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신비한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사실 아빠, 엄마의 사랑도 그런 식으로 느끼기 어렵다. 엄마, 아빠의 사랑은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기니까 말이다. 사람이 사랑을 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래서 안톤 체호프도 이 소설의 초반부에서 "사랑은 위대한 신비"라고 말했을 것이다. 만약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진 것이다.

 

 

인생을 돌아볼 때 숨막히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축복받은 사람이다. 화양연화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낫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랑에 대하여"도 "화양연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아는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살게 되지만 누구나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랑하면 행복하기도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면 불행해질 때도 많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왜 불행이 될 수 있는 사랑을 하기도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안톤 체호프의 말대로 사랑은 신비이고 선과 악의 판단을 넘어선 것이다. 사랑은 마치 인생에서 한 송이 꽃을 얻기 위한 무모한 시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을 얻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한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기도 한다. 사랑을 한 사람은 인생을 회상할 때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 인생, 사랑해서 좋았네."

 

얄로힌, 그리고 주모운.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나. 자네들의 인생은 아름다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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