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R2021-5] 열정, 다시 갖고 싶다_산도르 마라이 "열정"

설왕은 2021. 5. 22. 07:21

* 2021년 5월 30일 분당성화교회 청년부 독서 모임 다섯 번째 책으로 함께 읽었습니다.

* Reading 2021-다섯 번째 책

 

산도르 마라이는 헝가리 사람입니다. 헝가리 출신 작가도 많을 텐데, 제가 알고 있는 헝가리 작가는 산도르 마라이가 유일합니다. 헝가리어로 쓰인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사람들이 읽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죠. 헝가리 소설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을 가능성이 충분한 좋은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산도르 마라이는 1900년에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문방송학을 공부했고 잡지와 신문에 기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파리에 머물면서 좋은 시를 헝가리어로 번역하는 일도 했습니다. 그의 선조는 독일 사람이었지만 19세기 헝가리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헝가리 편에 섰고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라이는 그의 자전적 소설인 "어느 시민의 고백"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작가는 모국어 속에서만 살고 일할 수 있으며, 나의 모국어는 헝가리 말이었다.

 

작가는 모국어 속에서만 살고 일할 수 있다는 말에 저도 공감하고요. 이와 같이 산도르 마라이는 헝가리인이라는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어도 능통해서 독일어로도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요. 헝가리 말로 글을 쓰는 것을 고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 "열정"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비해서 덜 알려져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1989년 2월 캘리포니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의 작품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마라이의 작품은 헝가리에서 출판 금지되었고 1942년에 발표된 "열정"은 199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헝가리에서 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이 유명해진 것은 1998년 이탈리아와 1999년 독일에서 출판되고 난 이후였습니다. 이 소설은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산도르 마라이는 세계적인 거장들과 비견될 정도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2003년에 처음 읽었습니다. 그때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아서 서평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2021.05.20 - [이 글 어때?] - 인생도 열정도 진실도 건강에 해롭다_산도르 마라이 "열정"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친구가 40년 만에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내용입니다. 물론 책 한 권 분량이니까 대화의 내용은 매우 깁니다. 대화 속에서 지난 사건들을 설명하고 그때 기분을 말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대답에 따라서 혹은 예상되는 대답에 따라서 길게 길게 말을 이어가는데요. 그러면서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42년 작품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습니다. 이 당시는 인류 최악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헤어지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인류는 극도의 아픔을 견뎌야 했고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될 대로 훼손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인간은 무엇이고 삶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마라이가 이 소설에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통찰이 놀랍기도 하고요. 중간중간에 나오는 티키타카식의 대화가 긴장감이 팽팽하면서 재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헨릭과 콘라드가 41년 만에 만나기 직전에 헨릭과 유모가 나누는 대화입니다. (p.92)

 

 

"그 인간에게서 무엇을 원하세요?"

유모가 물었다. 

"진실."

장군은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아니, 모르네."

하인과 하녀들이 꽃을 꽂다 말고 쳐다보는 것에 개의치 않고,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눈을 내리뜨고 하던 일을 기계적으로 계속했다. 

"나는 바로 그 진실을 모르네."

"하지만 현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유모는 날카롭게 말했다. 

"현실은 진실이 아닐세."

장군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헨릭이 원하는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서부터 더 자세한 줄거리입니다. 줄거리를 알아도 작품을 감상하는데 별다른 방해는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모르고 싶은 분은 이 부분은 건너뛰시면 됩니다. 헨릭과 콘라드는 10살 때부터 진한 우정을 나눈 친구였습니다. 마치 쌍둥이처럼 두 사람은 항상 붙어 다니고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서로를 위해 주었죠. 그런데 어느 날, 헨릭과 콘라드가 함께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콘라드는 헨릭을 향해서 총을 겨눕니다. 헨릭을 향해서 겨누었는지 그 근처에 있는 짐승을 향해서 겨누었는지 정확하게 판가름하기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죠. 콘라드는 헨릭을 향해서 총을 겨누었고 헨릭도 자신의 친구가 자기를 죽일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콘라드가 겨누고 있던 사슴이 갑자기 달아나는 바람에 콘라드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내립니다. 그날 저녁에 콘라드와 헨릭과 헨릭의 아내 크리스티나는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눕니다. 그다음 날 콘라드는 홀연히 떠납니다. 그 소식을 듣고 헨릭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던 콘라드의 집에 찾아갑니다. 곧이어 크리스티나도 콘라드의 집에 나타나죠. 그리곤 한 마디 합니다. "겁쟁이." 그 말로 인해서 헨릭은 콘라드와 크리스티나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죠. 그날에 헨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별장으로 갑니다. 결국 헨릭과 크리스티나는 서로 떨어져 살게 되었고 당연히 서로 말을 걸지 않게 되었습니다. 8년이 지났을 즈음에 크리스티나는 죽습니다. 헨릭은 계속 콘라드를 기다리죠. 34살에 떠난 콘라드는 41년이 지난 75살이 되어서 헨릭에게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고 헨릭은 지난 41년의 세월을 거슬러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 두 가지 질문을 콘라드에게 던집니다. 


사실 줄거리를 아는 것이 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줄거리를 알고 글을 읽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책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헨릭입니다. 주인공이죠. 그런데 말이 주저리주저리 정말 많거든요.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면 41년 전 그날에 있었던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헨릭은 콘라드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지만 헨릭이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은 두 번째 질문입니다. 질문의 요점은 '인간의 왜 사는가'입니다. 삶을 모조리 불태우고도 남을 정열이 있었다면 그것이 지속하는 정열이 아니라 단 한순간의 정열이라도 그것이 삶의 의미를 만드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p.273)

 

정열이 삶의 의미를 만드는 점에서 심오하다고 할 수 있고, 헨릭의 삶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잔인했고, 헨릭과 크리스티나, 콘라드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의 40여 년의 세월을 흔들었다는 점에서 웅장했고, 아무런 죄책감, 사과, 치유도 없이 휩쓸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정열을 경험했다면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겠지,라고 헨릭은 묻고 있습니다. 콘라드는 이렇게 대답하죠. 

 

"왜 나에게 묻나?"

 

콘라드는 크리스티나에게 사랑의 정열을 불태웠지만 헨릭은 크리스티나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열이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 불타오를 수도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헨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삶의 진실한 내용은 죽은 여인을 향한 이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아닐까. (p.272)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왜 사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름대로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헨릭처럼 말이죠. '내 삶의 의미는 그리움이었지? 그리고 난 헛산 것은 아니지?"라고 말이죠. 그런데 콘라드는 "왜 나에게 묻나?"라고 답변해 버리죠. 헨릭이 살 수 있도록 버티며 콘라드를 기다릴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그리움이었다면 그리움이 그의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을 콘라드에게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한평생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그의 고통스러운 삶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고 친구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것일까요? 

 

헨릭이 알고 싶었던 것은 그날의 진실, 혹은 크리스티나의 진심이 아니었죠. 헨릭은 삶이라는 것의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콘라드에게 밤이 새도록 삶의 진실을 찾아온 자신의 여정을 풀어내었던 것이겠죠. 제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진지하게 삶의 진실을 찾는 헨릭의 진심 어린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헨릭이 콘라드에게 했던 두 번째 질문을 저에게 물어봤다면 저는 긍정의 답변을 해주었을 것 같습니다. 

 

2003년에 읽을 때도 '와, 이런 소설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읽었을 때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2003년도에 분명히 이 책을 샀거든요. 찾아보니 없습니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책들이 태평양을 두 번 건넜는데요.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은 태평양을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태평양을 건너갔는데, "열정"을 잃어버리고 돌아왔네요. 소설이라서 다시 안 사고 이번에 그냥 한 번 읽고 끝내려고 했는데, "열정"이 매력이 있네요. 다시 "열정"을 갖고 싶습니다. 


좋은 문장들이 있어서 기록해 놓습니다. 

마치 음악이 사나운 말이 끄는 보이지 않는 전설적인 마차를 폭풍우를 뚫고 세계로 몰아가고, 자유롭게 풀려난 힘이 질주하는 가운데 그들의 뻣뻣한 육체와 딱딱한 손이 고삐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p.65-66)

음악 감상에 심취해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죠. 

다리의 유일한 목적은 지상의 온갖 괴로움과 육체의 슬픈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춤에 있었다. (p.80)

그랬군요. 사람에게 다리가 있는 이유는 슬픔을 벗어나기 위한 춤을 추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었군요.

그는 빠르게 움직이는 목표점을 무표정한 얼굴로 뒤쫓았다. 그리고 조준하는 포수처럼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p.84)

콘라드를 41년 만에 만나는 헨릭이 콘라드를 실은 마차가 성에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견디기 어려워. 그것은 사람의 내장을 고갈시키고, 몸의 조직을 불태워버리네. 열대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죽인다네."
"그 때문에,"
장군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바로 자네 안의 것을 죽이기 위해서 그곳에 가지 않았나?" (p. 99-100)

콘라드에게 크리스티나를 향한 정열을 죽이기 위해서 열대에 가지 않았냐고 헨릭이 묻고 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기억은 쌀과 뉘를 골라낸다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 보면, 커다란 사건들은 사람의 내면을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어. 그런데 사냥 갔던 일이나 책의 한 구절, 아니면 이 방이 어느 날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네." (p.123)

동감입니다. 정말 별일 아닌 것 같은 것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많죠. 평생 따라다닐 정말 중요한 사건을 당시에는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 뒤에 숨어 있는 의도로 죄를 짓는 것일세." (p.145)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죠. 

그녀는 작별하듯이 방 안을 돌아보네. 잘 알고 있는 물건들과 작별 인사를 하듯이 하나하나 둘러보지. 자네도 알겠지만, 사물이나 방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네. 발견할 때와 작별할 때가 있지. (p.213)

동감합니다. 산도르 마라이의 통찰력에 놀란 문장입니다. 

단번에 늙지는 않아.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눈이나 다리, 심장이 늙네. 단계적으로 늙어간다네. 그리고는 별안간 영혼이 늙기 시작하지. 육신은 늙었을지 몰라도, 영혼은 여전히 동경하고, 기뻐하고, 또 기쁨을 희구하지. 기쁨에 대한 동경마저 사라지면, 추억이나 허영심만이 남네. 그런 다음 정말로 영영 늙는다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지. 그런데 무엇 때문에 깨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게야. (p.251)

사람이 이렇게 늙어가는군요. 사람이 늙는 과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저는 눈부터 왔고요. 다음 과정을 알아두면 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록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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