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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2021-6] 우리는 더 이상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_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설왕은 2021. 6. 25. 11:20

* [R2021-6] 2021년 독서모임 여섯 번째 책

* 사뮈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이 글은 소설이 아니라 연극 극본입니다. 글을 읽는 내내 연극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극본을 읽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별다른 설명 없이 사람들의 대화가 막 이어지니까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헷갈리고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연극으로 본다면 누가 누군지는 정확히 구분이 될 것 같았습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주인공의 이름도 낯설어서 인물 구분하는 것부터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극본으로 연출된 연극은 부조리 연극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좋은 말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요. 무척 정신이 없는 극본입니다. 그래서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극본을 읽는 것도 처음인데 이렇게 부조리한 극본을 읽으니 참 난감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계속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거 웃기는 이야기인가?" '이거 무서운 이야기인가?' '이거 그냥 재밌는 이야기인가?' '이거 결론이 있을까?' '고도는 누구일까?' '내가 이것을 계속 읽을 가치가 있을까?' 계속 읽고 있으면 정신이 분열될 것 같은 글이었습니다. 저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의 제목은 정말 많이 들어봤지만 그 내용이나 저자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도'가 사람 이름이라는 것을 얼핏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맥락이 없이 막 흘러가는데 단 하나의 줄기가 있습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이지요. 고도는 누구인지 모릅니다. 왜 기다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기다립니다. 

 

에스트라공: 가자.

블라디미르: 가선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그렇다면 고도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고도가 누구인지 이 극본에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고도는 신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Godot가 영어의 God가 프랑스어 Dieu를 합친 합성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둘 다 신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베케트가 신을 함축하는 단어를 일부러 쓴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신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베케트에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고도가 누구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베케트는 자신도 모른다고 자기가 알면 글에 써 놓았을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게 정확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극본의 전체 맥락에 그 설명이 맞습니다. 기다리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도가 신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기다린다는 것이죠. 베케트는 인간에게는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막연한 기다림이 있다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베케트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출간한 것은 1952년, 그의 나이가 47세일 때였습니다. 47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1952년이 중요합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복구가 한참일 때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전쟁은 인류에게 엄청난 물리적 타격을 가했고 더불어 인류가 받은 정신적 충격도 대단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인간들이 서로의 육체를 무참히 짓밟으며 서로를 파멸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를 지나서 19세기에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졌던 학문의 발전, 특별히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은 진정한 지구의 정복자로 등장하게 되었죠.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막대한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인간은 합리적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과학으로 얻은 힘을 잘 쓸 것이라고 19세기 20세기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몰랐는데 세계대전이 터진 거죠. 인간의 꿈과 믿음이 산산조각 나 버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인류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꿈꾸듯이)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에 잠긴다) 그건 멀지만, 좋은 걸 거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

에스트라공: 나 좀 안 거들어줄래?

블라디미르: 그래도 그건 오고야 말 거라고 가끔 생각해보지. 그런 생각이 들면 기분이 묘해지거든. (모자를 벗는다. 모자 속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흔들어보고 다시 쓴다) 뭐라고 할까? 기분이 가라앉으면서 동시에... (적당한 말을 찾는다)... 섬뜩해 오거든. (힘을 주어) 섬--뜩--해--진단 말이다. (다시 모자를 벗고 속을 들여다본다)  

(p.12-13)

 

이 섬뜩함Unheimlichkeit이라는 단어는 하이데거가 인간 존재를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인간이란 항상 염려하는 존재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을 설명하는 단어를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염려'입니다. 인간이 염려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대상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불안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인간이 존재로 살고 있는데 비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비존재를 '무'라고 할 수도 있고요. 인간은 결국 무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갑자기 불안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껏 편안함을 느꼈던 주위의 환경에 갑자기 어색함을 느끼면서 섬뜩한 기분이 드는 거죠. 한 사람의 삶에도 불안과 섬뜩함이 발생하지만 세계대전 이후의 인류는 공동체적 불안과 섬뜩함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깨달은 것이죠. '내가 알던 내가 내가 아니었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르구나.' 인간에 대한 큰 그림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 깨져버립니다. 그리고 조각만 남게 된 것이지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에게 남은 조각들을 열거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근원적인 불안감을 드러내죠. 순간순간 어떤 행동들을 합니다. 구두를 벗는다든가 당근을 먹는다든가 노래를 부른다든가 새로 만난 사람과 대화를 한다든가 그런 행동을 합니다. 심지어는 목매달아 죽으려는 시도도 합니다. 그런 행동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전체 맥락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모두가 다 조각이 나 버려서 각 이야기가 서로 붙지 않습니다. 마치 깨져버린 유리병처럼 말이죠. 그래도 완전히 모든 것이 부서져 버리고 더 이상 연극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 즈음에 배우들이 말하죠. 이제 그만 가자고. 그런데 안 된다고 또 말합니다. 왜냐하면 고도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이 정신없는 극본에 유일하게 흐르고 있는 정신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온 내용입니다. 

 

에스트라공: 정말 내일 또 와야 하니?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오자.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이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절로 나오는 말이 "무슨 소리지?"라는 말입니다.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것 같은 말들이 이어집니다. 유리컵을 깨뜨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떠드는 아이들의 대화 같습니다.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이미 깨진 유리컵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는데 엄마가 오면 해결이 될 것 같은데 엄마가 오지 않아서 또 서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서로 지껄이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거죠. 만약 말을 멈추면 너무 무서운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말을 멈출 수는 없고 그렇다고 딱히 생산적인 말을 할 것도 없고 하니까 막 나오는 대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래도 1950년대는 고도를 기다리기는 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 것 같아서요. 현대인의 삶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조각난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삶에 큰 맥락이 없죠. 맥락이 있다면 자본주의적인 맥락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을 삶의 의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파편화된 삶을 살고 있으면서 고도를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몇 년 전에 많이 팔렸던 에세이의 제목처럼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도를 기다리지 않지요. 파편화된 삶을 회복시켜 줄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극본은 현대 상황에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고도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지금 공연이 된다면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공감과 인기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짧은 극본인데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의미 없이 조각난 삶의 순간들을 사는 디디(블라디미르)와 고고(에스트라공)의 바보 같은 말과 행동을 보는 데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읽고 현대인의 틱톡 영상 같은 삶이 이미 1950년대에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상황이 더 악화된 것 같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와는 달리 사람들은 고도를 기다리지 않으니까요.

 

고도가 와서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면 우리의 조각난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우리는 이 조각들로 어떤 삶을 만들어 가야 할까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저에게 어려운 질문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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