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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그2]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_맨밥과 같은 소설

설왕은 2021. 10. 1. 09:00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박완서의 "그 시리즈" 세 권 중 두 번째 책입니다. 박완서의 자전소설은 모두 세 권의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 책이 박완서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하여 한국전쟁이 터져서 피난을 갈 때까지 경험을 담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고 두 번째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역시 '그'로 시작합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박완서가 한국 전쟁에서 겪은 일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책이 "그 남자네 집"입니다. "그 남자네 집"은 박완서의 첫사랑 이야기입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후반부에 보면 그 남자 이야기가 조금 나옵니다.

 

 

저는 1권을 제일 먼저 읽었고 그다음 3권을 읽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2권을 읽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순서로 책을 읽은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일단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제일 유명했기 때문에 먼저 읽었고 "그 남자네 집"은 자전소설이라는 것을 모르고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자전소설인 것 같기는 했는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으로 나온 자전소설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2권을 안 읽어서 이어지지가 않았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별로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단 제목이 그다지 흥미롭게 들리지 않았고 그리고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읽고 싶은 마음이 더 사그라들었습니다. 너무 아프고 슬플 것 같아서 그랬죠. 

 

"안방에선 올케가 오빠 다리의 총구멍에 심을 갈아 끼우고 있었다. 종아리는 바싹 말랐는데 총구멍은 생생하고도 깊었다. 심으로 박은 일 센티 너비의 가제는 그 안에서 서리서리 끝도 없이 풀려 나왔고, 새것을 집어넣을 때도 꾸역꾸역 한없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지켜보는 동안의 숨 막히는 고통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저 구멍이 차라리 심장을 관통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안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그 생각은 뜨겁고도 오싹했다." (11)

 

역시나 이 소설은 이렇게 아프게 시작합니다. 제대로 나을 것 같지도 않은 총상을 치료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과연 이 오빠는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조차 희미하게 하게 됩니다. 동생조차도 차라리 그 총알이 심장을 관통해 버렸다면 고통 없이 세상과 이별할 수 있었을 텐데 재수 없게 그 총알이 다리를 통과해서 간신히 살아가면서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마음의 고통까지 견뎌야 하는 오빠를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총상을 당한 박완서의 오빠는 몸보다 마음이 더 다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장면에 나타난 박완서의 시선과 생각이 매정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오빠는 곧 죽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죽을 거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표가 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오빠는 죽습니다. 

 

"총 맞은 지 팔 개월 만이었고, '거기' 다녀온 지 닷새 만이었다. 그는 죽은 게 아니라 팔 개월 동안 서서히 사라져 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그의 임종을 못 본 걸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너무도 긴 사라짐의 과정을 회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슬퍼할 것도 곡을 할 것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우린 미리 상갓집에 잘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20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한국전쟁의 경험을 담고 있지만 누군가 죽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겠지만 박완서가 군인이 아닌 이상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죽고 죽이는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오빠의 죽음은 이 소설에서 매우 독특한 장면 중에 하나였습니다. 모두가 죽음을 예측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사람이 팔 개월 동안 사라져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죠. 전쟁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측했던 끔찍했던 일들이 일어나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슬프고 아픈 일들로 인해서 사람들은 놀랄 것도 없습니다. 전쟁이 터진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일어난 일이 됩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가 박완서의 자전소설 중에서 가장 읽기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예상대로 전쟁의 아픔이 여기저기서 터지는데 그것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가슴 아픈 일인데 그것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박완서와 그 주변 인물들은 덤덤하고 억척스럽게 그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괴기스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플 줄 알았는데 그 예상대로 아파서 읽기 힘들었습니다. 자전소설이어서 그런지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도 않고 감동을 주는 사건도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정말 이렇게 아프고 슬프고 구질구질하고 구차하고 치사하고 부끄럽고 힘들었을 것 같은데, 정말 딱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넌 무엇이 보고 싶었던 거야?'

 

전쟁의 참혹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전쟁의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반짝반짝 빛났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진한 인간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까요? 기적 같은 생존담을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맨밥과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전쟁은 참혹했고 여기서 교훈을 얻겠다는 것은 사치인 것 같고 생각보다 재미있거나 신나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반찬이 없더라도 배가 고프면 맨밥이라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삼키기가 어렵지만 기운을 내기 위해서 삼켜야 하는 맨밥과도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중간에 공감을 할 수 있었던 내용은 서울 생활의 고달픔입니다. 전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계속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피난을 갔다가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피난을 가면 다행이고 남아있으면 인민군의 지배를 받았다가 국군의 지배를 받는 일이 또 반복됩니다. 그들에게 협조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또 반복됩니다. 박완서는 자반고등어 뒤집히듯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뀐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뜨거운 변화이고 그 변화에 적응하기도 무서운 것이 또 언제 뒤집힐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했던 사람들은 세상이 뒤집히는 순간 바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을 읽으면서 이런 영향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류에 민감할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신념이 중요하죠. 아무도 기회주의자를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기회주의자의 손아귀에 넘어갈 때가 많지만, 기회주의자조차로 기회주의자를 높이 평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념을 지키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면 어느 누가 신념을 버리는 사람을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는 세상이 그랬다는 것을 이 소설을 보면서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구차하지만 살아야 하는데, 그나마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덜 구차하게 살 수 있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소설에는 유명한 사람이 한 사람 나옵니다. 박수근 화가인데요. 실제로 박완서 작가가 만났기 때문에 아마 소설에 실명으로 나왔을 것 같습니다. 박완서는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미군들이 이용하는 상가 같은 곳의 초상화부에서 관리자 역할을 합니다. 초상화부는 대여섯 명의 화가들이 미군들의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받는 일을 했습니다. 박완서가 20대 초반이었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사십 대 전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그림을 그려 주고 몇 불을 받는 화가들이 대단한 예술가일 가능성은 별로 없죠. 박완서도 화가들을 무시하면서 일을 시키는데, 그 화가 중 한 사람이 박수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을 것이고 나중에 박수근 화백이 유명해지면서 아마 그때 기억을 떠올렸을 것 같습니다. 박완서는 박수근이 그리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그는 예술보다 사는 일을 우선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것도 아마 예술이 아니라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307)

 

박수근 화백의 작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가가 가장 사랑한 것은 "사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박완서는 말합니다. 삶이 이따위인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 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것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사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 거의 다 모른다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런 걸 왜 물어보냐고 핀잔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완서가 우는 장면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격렬하고 난폭한 통곡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찌꺼기도 안 남게 다 울어 버리기까지는 온종일 걸렸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 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355-356)

 

 

삶은 아픈 것이죠. 하지만 아픔을 느끼는 것도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픈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면서요. 그렇다면 이유가 없이 삶을 사랑해야 진짜 사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맨밥 소설,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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