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고시

매력적인 이질감_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설왕은 2019. 10. 26. 00:4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제가 요새 시를 좀 읽고 있는데요. 시를 평소보다 많이 읽으니까 이해하기 쉬운 시는 처음에는 좋은데 씹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할까요? 다시 읽고 싶고 되뇌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백석 시인의 시를 읽어 보았습니다. 예전에 백석 시인의 시가 좋다고 해서 대표작인 이 시를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는데 그 이질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질감을 느꼈던 이유는 나타샤와 흰 당나귀 때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나타샤는 가난한 나에게, 소주를 마시며 외로움을 달래는 나에게,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나타샤라는 이름이 너무 멀게 느껴졌고 흰 당나귀는 또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당나귀 보기도 쉽지 않은데 흰 당나귀가 나타나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시인은 눈이 푹푹 나리는 술 취한 저녁에 흰 당나귀를 타고 아름다운 나타샤와 함께 깊은 산골 오막살이를 꿈꾸고 있습니다. 꿈도 이 정도 꿈이면 정말 너무 허무맹랑하고 아주 작위적인 꿈입니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이질감을 느꼈지만 매력적인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더 다가가서 알아보고 싶은 그런 신비한 기운이 돌았습니다. 일단 시의 시작이 좋았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오늘밤 눈이 나리는 이유가 내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사랑해서였던 것이죠. 사랑을 하고 있는데 사랑이 잘 안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시는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 김진향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김진향은 기생이었고 백석은 엘리트 문학청년이었습니다. 둘의 관계는 가족과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관계였기 때문에 백석은 그녀에게 도망가서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오히려 반대했고요. 백석은 북에 살고 진향은 남에 내려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전쟁이 발발하고 그 이후에 38선이 그어져 남쪽과 북쪽은 왕래가 불가능하게 되었죠. 그런 상태로 백석은 북녘 땅에서 1996년에 하늘로 올라갔고 김진향은 남쪽에서 1999년에 명을 다했습니다. 김진향은 죽기 전에 이 시가 쓰여 있는 종이와 자신을 함께 태워서 눈이 오는 날 뿌려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시가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들리고 읽힐지 그것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이 시는 '운명의 끈'과 같이 서로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을 담은 슬프고 아름다운 '운명의 끈'입니다. 

 

시의 시작을 보면 시인이 사랑해서 눈이 내리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시인이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닙니다. 그저 눈이 나리고 나타샤는 시인 옆에 없고 시인은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나타샤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시인은 말합니다.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시의 마지막 줄이 묘한 감정을 일으켰습니다. 흰 당나귀는 헛된 상상입니다. 그런데 그냥 스쳐 지나갈 것 같던 이 흰 당나귀는 시의 마지막 행에서 울음소리를 냅니다.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좋아서 운다는 데 저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좋아서 우는 것인지 아기처럼 소리 내서 슬프게 우는 것인지 그 소리가 묘합니다. 나타샤와 함께 눈 내리는 밤 머나먼 산골로 떠나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인데 현실은 정반대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을까요. 흰 당나귀의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리네요. 방정맞은 것 같으면서 슬프고 처연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의성어가 시를 읽은 후에 한참 동안 귓가에 맴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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