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고시

그리움에 빠지다_백석 "바다"

설왕은 2019. 10. 31. 09:51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바다"는 백석이 그가 사랑했던 여인 김진향을 생각하면서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지꽃은 나팔꽃을 일컫는 말인데 나팔꽃에 나팔이 아니 나왔다고 하니 아마도 시인이 바닷가에 온 시기는 여름철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나팔꽃은 7~9월에 피는 꽃입니다. 이 시는 철 지난 바닷가의 적적한 분위기 속에서 바닷가를 걸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시인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 시입니다. 

 

시인은 바다에 혼자 간 것 같습니다. 그냥 바람도 쐬고 탁 트인 바다도 보려고 철지난 바다에 혼자 나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가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녀와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바다에 왔는데 바다를 즐기지 못하고 추억에 빠져 버립니다. 기억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 있지만 정말 좋은 기억은 기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게 됩니다. 다시 그 기억 속의 경험을 하고 싶다는 마음의 간절한 바람을 시인은 말합니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바다에 온 김에 보고만 갈 수 없으니까 시인은 바다에 가까이 갑니다. 바다에 가까이 가려면 백사장을 지나야 합니다.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 애써서 모래톱에 올라갔다가 또 내려가면서 바다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또 그녀가 생각납니다. 그녀와 함께 바닷가에 도착해서 바다를 향해 뛰어가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기쁜 소리를 내면서 바다로 뛰듯이 걸어갔겠죠. 

 

그리고 이제 바다가 발에 달랑 말랑 한 곳에 도착합니다. 그러자 시인은 바다를 따라서 걷습니다. 지중지중 걷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지중지중은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천천히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주는 소리만으로도 그 뜻이 이해가 됩니다. 백석은 물가를 걸으며 파도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커졌다가 줄어들는 것을 반복하는 파도 소리를 시인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환상이 깨집니다. 나팔꽃에 나팔이 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시인은 못내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녀와의 추억이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은 환상에서 깨어납니다. 마치 아침 햇빛에 눈이 부셔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백석은 고기비늘에 반사되는 햇볕으로 인해 쇠리쇠리하여 꿈에서 깨어납니다. '쇠리쇠리'는 '눈이 부시다'의 평안북도 방언입니다. 좋은 꿈을 꾸다가 갑자기 깨어나면 쓸쓸하고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시인의 표현은 바로 그런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 김진향이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다 기부했을 때 기자가 와서 아깝지 않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김진향이 "나의 전 재산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고 일갈했다고 하네요. 백석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이 시는 김진향을 생각하며 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여인을 생각하며 쓴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석의 재능에 대한 김진향의 평가에는 왈가왈부할 거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바다는 그리움에 빠지는 곳임을 알려주는 백석의 "바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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