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고시

누구의 시입니까_한용운 "알 수 없어요"

설왕은 2019. 11. 11. 19:57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학교 다닐 때 분명히 배웠던 시입니다. 어린 시절에 배운 시들은 거의 모두 재미가 없었습니다. 시를 음미할 여유가 없이 개구리 해부하듯이 조각조각 내기에 바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개구리를 관찰하고 있으면 폴짝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파리를 잡아먹는 것도 볼 수 있을 텐데요. 개구리를 해부하는 것은 번거롭고 징그럽고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시를 감상하는 것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냥 이해되는 것은 이해되는 대로 잘 모르겠는 부분은 그냥 잘 모르는 대로 느낄 수 있으면 좋은 것 같습니다. 무조건 알아야 하니까 막 잘라서 목구멍에 집어넣는 배움은 정말 별로입니다.

 

나이 들어서 시를 다시 읽어 보니 분명히 글자이고 문장인데 시를 읽으면 바람이 불고 소리가 나고 따뜻함도 느껴졌다가 매서운 한기가 느껴지기도 하네요. 신기한 일입니다. 

 

제가 이번에 읽으면서 감탄했던 부분은 다섯 번째 행입니다.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붉게 물든 저녁놀을 이렇게 표현하다니요. 연꽃 같은 발꿈치라는 말로 저녁놀의 고운 붉은빛의 색을 표현하고 있고요. 옥 같은 손이라는 말로 노을이 뿜어내는 광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가 노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을이 해를 단장하고 있다는 만해 한용운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인이 묻습니다.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시를 쓰고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일 텐데, 한용운은 저녁놀이 시라고 감탄하며 말합니다. 그렇죠. 붉게 물든 저녁놀만큼 인간의 감정에 파고드는 광경이 있을까요? 그래서 한용운을 그 광경을 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완존 맞는 말입니다. 

 

가이 없다는 표현을 찾아 보았습니다. 이말은 띄어 쓰는 것이 아니라 붙여 쓰는 것이 맞습니다. 가이없다는 말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보통은 잘 안 쓰는 말인데요. 그런데 우리는 '어머니 은혜'라는 노래를 부를 때 이 말을 씁니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이 말을 씁니다. '가'는 '끝'이라는 뜻입니다. 바닷가, 우물가에서 쓰는 가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왜 가가 없다라고 쓰지 않고 왜 가이없다라고 쓰냐면 근대 국어 이전에는 주격 조사로 '이'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가 없다'가 아니라 '가이 없다'로 썼고 이 말은 살아 남은 거죠. '끝이 없는' 보다는 '가이 없는'이 느낌이 훨씬 좋습니다. 

 

여섯 번째 행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저는 이번에 다섯 번째 행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 저작권이 만료된 시만 전문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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