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고시

고양이는 봄이 맞습니다_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설왕은 2019. 11. 21. 19:00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왠지 최근에 썼을 것 같은 시입니다. 요새 고양이 키우시는 분들이 정말 많잖아요.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이 시는 약 100년 전에 지은 시입니다. 이 시는 시인 이장희가 1924년에 쓴 작품입니다. 이장희는 1900년에 태어나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인이 24세에 지은 작품입니다. 이장희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봄의 향기, 봄의 불길, 봄의 졸음, 봄의 생기를 고양이의 생김새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데 그럴듯합니다. 저는 2연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호동그란이라는 단어도 마음에 들고요. 사전을 찾아보니 '호동그라니'의 뜻은 '매우 동그란 모양으로'이고 '호동그랗다'는 '호젓하고 조용하다'라고 하는데 호동그라니가 호동그랗다의 변화형 같은데 왜 이렇게 뜻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금방울처럼 빛나고 매우 동그란 모양의 고양이의 눈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의 눈에서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른다고 표현하고 있네요. 밤에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내는 고양이의 눈이 마치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내고 하늘과 땅에서 올라오는 따뜻함, 마치 주체할 수 없이 넘쳐흘러서 생명을 깨우는 그 기운을 '미친 봄의 불길'이라고 지칭하는 시인의 표현력이 참 좋습니다. 

 

각 연의 마지막의 동사들도 다채로워서 느낌이 좋습니다. 어리운다, 흐른다, 떠돈다, 뛰논다와 같은 동사가 봄과 참 어울립니다. 아주 거칠지 않으면서 그러나 힘이 없는 것은 아니고 뭔가 힘이 느껴지면서도 어린아이의 동작처럼 가벼움과 명랑함이 있습니다. 고양이를 보면서 '이 녀석 참 봄 같구나'라고 빤히 쳐다보았을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이 시를 읽으며 '정말 봄은 고양이를 닮았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고양이가 주인을 잘 따르지 않으면서도 참 묘한 매력이 있잖아요. 봄도 그런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의 매서운 분위기를 이겨 내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봄의 도발적인 도도함이 고양이와 닮은꼴입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름, 가을, 겨울은 어떤 동물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딱히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러나 확실히 봄은 고양이가 맞는 것 같습니다. 

 

쌀쌀한 가을날, 추운 겨울날, 고양이와 함께 노는 것은 작은 봄과 함께 하는 것이겠네요. ^^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