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고시

[현대시] 단 한 번의 영원한 경험_고정희 "겨울 사랑"

설왕은 2021. 1. 20. 10:59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고정희 "겨울 사랑" in 아름다운 사람 하나 (p. 89)

 

오래전에 잭 블랙이 주연으로 활약한 "스쿨 오브 락"을 봤습니다. 잭 블랙 특유의 유쾌함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영화였습니다. 재밌었고 뭉클함도 있었고 음악이 들어가 있는 영화라서 귀도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하나 있었어요. 잭 블랙이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단 한 번의 공연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

 

더 이상의 공연이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단 한 번만으로 공연을 끝내야 하는데 한 번뿐이 공연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 주인공은 이렇게 말을 하죠.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데 그 한 번의 공연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 보면 좀 암울하죠. 그런데 그 한 번의 공연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죠.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종종 그 대사가 기억이 났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에 있는 "겨울 사랑"이라는 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번의 감촉, 그리고 조용했던 한 번의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다는 시인의 고백이 거짓말 같으면서도 진실되게 들렸습니다. 지금 느끼는 감촉, 지금 느끼는 따뜻함이 아니라 이전에 느꼈던 단 한 번의 따뜻한 감촉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추운 겨울을 몇 번 버틸 수 있는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게 들렸습니다. 

 

수없이 포옹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지금 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경험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흔들려 벽이 무너지고 마음의 꽃밭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가 진동하고 혈관 속을 흐르는 피가 별이 되어 운행하던 단 한 번의 특별한 감촉이 있었다면 그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데요. 그런데 그것에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또한 사랑을 한다는 것도 경이로운 경험이지요. 그런데 뭐든지 반복되는 경험은 그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무던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놀라운 경험이 단 한 번으로 그치게 된다면요. 정말 아쉬운 것이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 한 번의 경험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 경험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고 그 소중한 기억을 통해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소백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이 표현들이 특히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포옹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왜 소백산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산 한쪽을 들어 올려지는 것처럼 나의 존재를 뒤흔들었던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요. 혈관 속에 별이 흐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윽한 진실이라는 표현도 좋았습니다. 그윽한 기쁨, 이윽한 진실이라는 구절을 통해 형용사의 각운을 맞추었는데요. 이윽한이라는 단어는 처음 봤습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니 '그윽한'의 비표준어 혹은 '이슥한'의 방언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로 썼는지 정확하게 분간하기 어렵네요. 둘 다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의 삶을 버티게 하는 경험이 무엇이 있나, 하고 기억을 헤쳐보게 하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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