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고시

떨어지는 잎_릴케 "가을"

설왕은 2019. 11. 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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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하늘의 먼 정원들이 시들어 버린 듯이.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다른 별들에서 떨어져 고독에 잠긴다.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두 손에 받아들인다.

 

 

가을에는 감수성이 예민해집니다. 제 생각에 날씨가 추워지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더운 것이나 추운 것이나 우리가 견디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분위기죠. 아마도 이 예민해지는 분위기에 가장 크게 일조하는 것이 낙엽일 것 같습니다. 떨어지는 잎, 그리고 이미 떨어져서 바닥을 쓸쓸하게 뒹굴고 있는 잎을 보면서 릴케는 '아, 나도 언젠가는 떨어지겠구나'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시는 릴케의 초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아직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할 나이가 아니었을 텐데, 릴케는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죽음을 떠올린 것 같습니다. 떨어지는 것은 부정하는 몸짓이고, 지구도 낙엽처럼 떨어져서 고독에 빠져 있고, 그리고 우리도 모두 떨어질 것이고, 올렸던 손도 결국 다시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해 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릴케는 청승맞게 푸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 반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운 두 손에 받아들인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손으로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 이런 말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혹은 아이들에게 떨어지는 잎은 놀이이고 축복의 기회입니다. 분위기는 아무리 꿀꿀해도 사랑이 이깁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개역개정)

"Love never fails." (NIV)

 

릴케의 가을 마지막 연은 아마도 성경에서 영감을 받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나뭇잎은 떨어져도, 지구는 떨어져도, 사람은 떨어져도, 사랑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손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할 수 있다면 가을이 쓸쓸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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