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파리를 사랑하십니까?_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설왕은 2019. 11. 30. 07:42

김승옥은 무진기행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무진기행은 아름답고 감수성이 넘치는 문장으로 유명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이유는 오롯이 무진기행 때문이었습니다. 무진기행과 같은 글을 기대하면서 읽었습니다. 무진기행처럼 지명 이름이 소설의 제목으로 나오고 또한 계절도 나오기 때문에 낭만적인 글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읽어 보니 작품이 매우 암울하고 현실적인 느낌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우연히 만난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매우 짧고 강렬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요. 

 

소설의 첫 부분은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의 서막을 올리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장황하게 나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처음 만나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잘 읽히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과 처음 대화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또 상대방이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전 지식이 없어서 이해도가 떨어지는 그런 상황과 같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 저는 이 소설에 끌렸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소개들은 끝났지만 그러고 나서는 서로 할 얘기가 없었다. 잠시 동안은 조용히 술만 마셨는데 나는 새카맣게 구워진 군참새를 집을 때 할 말이 생겼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군참새에게 감사하고 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안 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아직까진.......' 그가 말했다. '김 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예."라고 나는 대답했다.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 본 적이 있으세요?" 

(서울 1964년 겨울, 민음사, 43.)

 

 

파리를 사랑하느냐는 말이 웃겼습니다. 저는 프랑스 파리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온 파리는 프랑스 파리가 아닌 여름에 날아다니는 곤충 파리를 의미합니다. 질문도 웃겼지만, 대답도 기상천외했습니다. '아니요, 아직까진...'이라는 대답도 보통 사람은 아니죠. 그리고 또 물어봅니다. "김 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그리고 주인공은 그렇다고 대답하죠. 그런데 그 이유도 참 뜻밖입니다. 파리가 날 수 있고 또한 날 수 있는 것 중에서 자기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1960년 서울 (존 도미니스 촬영)

 

이 소설은 이런 식으로 뜻밖의 대사, 뜻밖의 사건들이 쭉 나열됩니다. 평론가들이 이 소설을 어떻게 분류할지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볼 때는 이 소설은 실존주의 소설로 부를 만합니다.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그래서 의미를 연결할 수 없는 사건들이 쭉 이어집니다. 웃기는 장면도 그리고 비극적인 장면도 그저 담담하게 서술됩니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장면이 묘사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지지만 작가는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저 서술만 합니다. 소설의 인물들과 같이 공간에 있으면서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서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련의 사건들, 대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입니다.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고 가능성을 극대화시킨다는 점에서 저는 이 소설을 실존주의적 소설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1960년 대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냥 추측해 보아도 대충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약 10년이 흘러갔지만 일본과 전쟁이 남긴 상처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때 부유하지도 않았고 정치는 혼란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또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노력했을 것입니다. 삶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으로도 짠한 느낌이 전해질 시대인데 비극은 예고도 없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은 바로 그런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파도 슬퍼도, 아파하고 슬퍼할 여유가 없는 춥고 거칠고 메마르고 쓸쓸한 삶을 보여 줍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은 훌륭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아픔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무진기행"만큼 사랑받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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