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그 영감님 속옷에서는 쨍그렁 소리가 난다_박완서 "마흔아홉 살"

설왕은 2020. 2. 15. 23:20

이 소설은 미스터리 추리 단편 소설 같습니다. 글에서 풀고 싶어 하는 수수께끼는 "그 여자(카타리나)는 시아버지의 속옷을 빨 때 왜 그렇게 꺼려하는가?"입니다. 시아버지의 속옷을 세탁기에 넣는 것이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아주 꺼려할 만한 일도 아닐 텐데요. 게다가 그 여자는 성당에서 효부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홀로 된 할아버지들을 목욕시키는 봉사 활동도 합니다.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여자가 남자의 알몸을 씻기는 것은 꺼려할 수 있는 일인데요. 그 여자는 전혀 그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보통 다른 이들이 씻기기 꺼려하는 아랫도리를 이 여인이 도맡아서 할 정도로 그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더 미스터리한 것이겠죠. 사람들이 모여서 그 이유에 대해서 토론을 해 볼 정도입니다. 

 

주인공 카타리나가 시아버지의 속옷을 어떻게 대하는지 서술한 문장이 있습니다. 좋은 표현이어서 옮겨 봅니다. 

 

"어디서 그런 집게는 구했는지 이따만 하게 기다란 집게 끝으로 시아버지 팬티를 집어 가지고 그 어른 방에서 나오는데 어찌나 험하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지, 난 카타리나가 빨랫감이 아니라 약 먹고 죽은 쥐나, 뭐 그런 끔찍한 걸 집어 가지고 나오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그게 다였으면 이런 말 꺼내지도 않을 거야. 글쎄 끝까지 그 영감님 속옷을 죽은 쥐 취급을 하면서 다용도실까지 뻗쳐 들고 가더니 세탁기 안으로 냅다 뿌리치는데, 그 서슬이 어찌나 시퍼렇던지 그까짓 헝겊조각에서 쨍그렁 소리가 나는 것 같더라니까."

 

헝겊조각에서 쨍그렁 소리를 만드는 작가의 솜씨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것을 글이 아닌 어떤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글로는 느낌이 정말 충분히 전달되는데, 영상이나 음악 같은 걸로 이런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글의 위대함, 문장의 위대함을 느꼈습니다. 말이 만들어내는 세상이 재밌습니다. '서슬'이라는 단어도 다시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었습니다. '서슬'은 독이 올라 날카로운 기세나 칼날 등의 날카로운 부분을 뜻한다고 합니다. 서슬이 시퍼렀기 때문에 헝겊조각에서 쨍그렁 소리도 낼 수 있었겠지요. 

 

카타리나는 왜 그러는 것일까요? 별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그 궁금증을 풀어가는 역할을 하는 탐정 같은 친구가 있습니다. 동숙이라는 친구입니다. 동숙이와 카타리나는 한참 대화를 하면서 그 미스터리를 풀어내는데요. 결론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시아버지의 속옷을 보면 시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러면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가 없다고 설명을 합니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미스터리를 풀어놓았는데 저는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주인공 카타리나의 친구인 동숙이는 충분히 알아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고(주억거리다: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거리다) 쓰고 있는데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아마 나중에 고부간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꼭 누가 죽거나 기이한 일이 발생해야 미스터리 추리소설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마치 추리소설을 읽듯이 읽었습니다. 사실 별것도 아닌 행동인데요. 카타리나는 왜 시아버지의 속옷을 죽은 쥐 다루듯이 다루는 것인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소설을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이런 관심은 좋을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 이상한 행동의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나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요.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추리 능력은 이런 것이겠지요. 우리가 살인 사건을 해결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이나 타인의 이상 행동의 원인을 찾아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고 재밌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동숙이가 16대 대선에서 투표한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16대 대선은 2002년에 노무현과 이회창이 맞붙었던 대선이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노무현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숙이는 투표 전에 이회창을 찍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언급하는데요. 그 문장을 보는데 마음이 덜컥 내려 않더라고요. 동숙이가 이회창을 찍어도 어차피 대통령은 노무현이 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소설에서 언급되고 있어도 그에 대한 부채 의식과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지어낸 소설이고 그 소설 속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이 하는 행동은 우리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요. 그래도 동숙이가 결국 노무현을 찍었다고 하니까 그래요, 참 잘했어요, 라고 마음속으로 칭찬했습니다. 이게 뭔지 모르겠는데 묘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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