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시대의 아픔이 느껴지는 묵직한 소설_황순원 "목넘이 마을의 개"

설왕은 2020. 2. 21. 09:00

 

 

 

저는 요새 우리나라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소설을 읽는 이유는 첫째, 문장을 읽는 맛이 좋습니다. 번역서도 좋은 번역가가 쓴 글은 어느 정도 읽을 맛이 나는데요. 그래도 소설가가 쓰는 문장과 번역가가 쓰는 문장은 좀 다릅니다. 번역가는 아름다운 문장이 생각이 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쓸 수는 없습니다. 번역이니까 원문의 뜻에 맞게 써야 합니다. 그러나 소설가는 훨씬 자유롭습니다. 철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들을 보면 이상한 문장이 많은데 소설은 문장 읽는 맛이 훨씬 좋습니다. 둘째, 공감하기 쉽습니다. 소설은 생활 밀착형 글입니다. 여러 가지 묘사를 할 때도 많고 여러 가지 사물도 나오고 이런저런 사람도 나옵니다. 배경이 우리나라가 아니면 아무래도 상상하기도 어렵고 공감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소설이 외국 소설보다 훨씬 공감하기 좋습니다. 셋째, 글이 주는 메시지가 간접적이라서 좋습니다. 아무래도 가르치듯이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은 괜히 반항심이 듭니다. 그런데 소설은 서서히 스며든다고 해야 할까요. 분명히 글이 주는 메시지가 있는 경우가 있고(없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ㅎㅎ) 그것을 강압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이야기로 전달하니까 훨씬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해석하는 재미도 솔솔합니다. 

 

 

황순원 작가의 글을 읽어 보고 싶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소나기"는 읽었지만 그 외의 작품을 접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읽는 단편 소설 중 유일하게 재미있게 읽고 또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 바로 "소나기"였습니다. 그래도 황순원의 다른 소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에 황순원 문학상을 받은 소설들을 읽다가 문득 '황순원이 어떤 소설을 더 썼길래 황순원 문학상이라는 것이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에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일단 "카인의 후예"가 유명했고요. "독 짓는 늙은이"도 제목은 참 많이 들어본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카인의 후예" 단행본에 있는 는 단편 소설 "목넘이 마을의 개"를 읽어 보았습니다. 

 

 

이 단편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했습니다. 왜 나는 이런 개 이야기를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개 이야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주 짧게 말하면 "목넘이 마을의 개"는 신둥이(흰둥이)라는 개가 죽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강아지를 낳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정말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글을 읽는 중간에 살짝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신둥이가 미친 개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줍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신둥이가 미친 개라고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신둥이가 더 미쳐서 제대로 미친 짓을 하기 전에 신둥이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죠. 글을 읽는 사람은 고민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신둥이를 빨리 죽이기를 바라고 응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둥이가 미친개인지 아직 정확하지 않으니 더 두고 봐야 하는가. 저는 다소 후자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친개가 동네에 돌아다니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빨리 결정해서 문제의 싹을 잘라 버리는 것도 아주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둥이는 소설의 중간에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런데 동네의 다른 개들도 며칠 사라졌다가 돌아오는데요. 동네 사람들은 며칠 사라진 개들도 신둥이에게 오염(?)되어서 미친개가 될 위험에 놓였다고 생각하고 잡아먹습니다. 개를 잡아먹는 장면을 서술한 부분이 참 잔인했습니다. 요즈음처럼 개를 인간의 친구로 여기는 문화에서는 더 끔찍하게 느낄만한 서술이었습니다. 

 

사라졌던 신둥이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둥이는 홀몸이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사람들이 신둥이를 잡으러 가서 신둥이를 포위합니다. 간난이 할아버지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간난이 할아버지의 가슴속을 흘러 지나가는 게 있었다. 짐승이라도 새끼 밴 것을 차마?"

 

간난이 할아버지의 마음이 약해져 있는 틈에 신둥이는 할아버지 옆을 지나서 도망갔습니다. 한 달 후쯤에 간난이 할아버지는 나무를 하러 갔다가 신둥이와 신둥이의 강아지 새끼들을 발견하고요. 강아지가 어느 정도 크자 한 마리를 데려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소설은 끝납니다. 그리고 소설이 끝나고 이 소설이 1948년 3월 <개벽>이라는 잡지에 실렸다는 것을 표시해 주더라고요. 

 

서북청년단의 모습

 

시대의 아픔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만약에 이 소설이 1948년에 나온 작품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그냥 신둥이라는 개에 관한 일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1948년이면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시기입니다. 그 이념에 따라서 반대쪽 이념을 가진 사람은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지요. 마치 미치기 시작하는 개처럼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반대쪽 진영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분위기가 아주 만연해 있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미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는지 그때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식으로 상대 진영의 사람들을 해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대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정말 회까닥 돌아서 사람들을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요. 황순원 작가는 그냥 지나가듯이 한 마디 한 것이지요. "짐승이라도 새끼 밴 것을 차마?" 짐승이라도 새끼 밴 것을 죽이는 것이 옳지 않다면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목넘이 마을의 개"는 좀 어려웠습니다. "소나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고요. "카인의 후예"도 좀 읽다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평안도 사투리도 잘 적응이 되지 않고 "목넘이 마을의 개"를 읽을 때처럼 소설 속에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목넘이 마을의 개"는 단편이어서 그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지만 장편소설은 길어서 궁금증을 계속 유지하기 힘들더라고요. 전체적으로 "목넘이 마을의 개"는 다소 어려웠지만 묵직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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