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신학노트] 언어는 실재에 참여한다_상징과 기호, 그리고 신화

설왕은 2021. 3. 15. 16:25

언어는 실재에 참여합니다. 모호한 진술 같지만 실제 사례를 생각해 보면 금방 수긍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짜장면을 먹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짜장면을 먹을 때 그냥 아무 말 없이 먹는 것과 "맛있다"고 말하면서 먹는 것과는 다릅니다. 혹은 누군가로부터 "이 짜장면 진짜 맛있지?"라는 말을 들으면서 먹는 것과 그냥 먹는 것과는 다릅니다. 혹은 이런 말을 들으면서 먹으면 어떨까요? "이 짜장면의 면발이 너무 탱탱해서 마치 갓 잡아 올린 살아 있는 낙지의 다리를 씹는 것 같아." 이런 말을 들으면서 짜장면을 먹는 것과 아무런 말 없이 짜장면을 먹는 것과는 다릅니다. 똑같은 짜장면을 먹는 데도 말이죠. 기분과 느낌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만, 언어로 인해서 인간이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실재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면 실재가 달라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 실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감각에서 그 대상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실재가 변화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언어가 실재에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상징의 언어와 기호의 언어를 비교해 봅시다. 상징과 기호의 주된 차이점은 상징은 실재에 참여하고 기호는 실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폴 틸리히 "문화의 신학", p.79) 신학자 폴 틸리히가 제시하는 예는 국기와 신호등입니다. 국기는 상징입니다. 태극기는 상징 언어이고, 태극기라는 물건은 상징적 물건입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 국가라는 실재에 참여해서 조직을 강화하기도 하고 힘을 북돋아주기고 합니다. 미국은 거대한 성조기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성조기를 괜히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통합된 힘을 유지하는 데 성조기가 분명히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여러 민족이 모여서 살고 있고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 통합이 절실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거대한 성조기를 여기저기 설치해서 그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신호등은 단순한 기호입니다. 빨간 불과 초록 불은 그 빛깔만으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색깔이 지시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빨간색은 정지를 의미하고 초록색은 움직여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빨간불과 초록불이 정지와 이동이라는 실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순히 의미를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호입니다. 기호가 기호가 지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 낼 때 그 기호는 상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징은 주요한 기능은 실재의 심오한 구조와 본질을 드러낸다는 데에 있습니다. 상징은 일종의 다리와 같습니다. 상징은 실재를 개방합니다. 그래서 실재가 온전히 다 알려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것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실재의 심오한 구조와 본질의 일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징은 인간을 개방시킵니다. 물론 상징이 모든 인간을 개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상징에 의해서 실재를 파악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상징은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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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상징적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상징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상징이라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실재는 없는 것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콜라주의자들이 말하는 "존재 자체" Being itself 혹은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의 근원 ground of being, 궁극적 존재라는 실재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상징은 실재를 포함하지만 인간과 신의 만남을 말할 때 신은 인간과 같은 존재로 표현됩니다. 인간과 같은 신, 즉 인격신은 일종의 상징적 형식입니다. 이 상징적 형식을 버리고 신과 인간의 만남을 표현하기는 곤란합니다. 상징적 형식을 통해서 신의 감추어진 신의 속성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이 인간인 것은 아닙니다. 신은 인간 이상의 존재입니다. 국기가 국가를 상징한다고 해서 국기 자체가 국가가 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틸리히는 상징을 폄하하는 경향은 상징과 기호를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기호는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상징은 실재에 참여하고 실재의 심오한 구조와 본질을 열어서 보여줄 수 있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상징은 문자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상징일까요, 아니면 기호일까요? 아담은 인간을 상징하고 있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최조의 인간을 지칭하는 기호일까요? 현대신학자들은 아담을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을 기호로 간주합니다. 아담을 상징으로 해석할 때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훨씬 더 깊고 넓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아담을 기호로 받아들이면 창세기의 이야기는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됩니다. 종교의 주목적은 사실을 서술하고 전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과 삶의 의미를 제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상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인 신화를 제공합니다. 

 

Image by Jeff Jacobs from Pixabay  

 

그런데 틸리히는 신화를 깨뜨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신화는 깨진 신화 broken myth 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제공하는 이야기가 신화에 불과한 것이냐, 라고 다시 또 궁금할 수 있는데 신화는 궁극적 실재를 열어줄 수 있는 이야기이며 거대담론을 통해서 인간과 삶의 의미를 밝혀 줄 수 있는 상징적 형식을 갖춘 이야기입니다. 신화는 실재에 참여하는 이야기이며 신화를 통해서 인간은 새로운 실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신화면 신화이지, 깨진 신화가 되어야 할까요? 저도 틸리히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신화가 깨진 신화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상징이 우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상징은 실재의 심오한 구조와 본질을 드러내지만 그것 자체가 실재는 아닙니다. 그런데 상징 자체를 실재로 여기고 그것을 우상화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그리스도교가 본질상 깨지지 않는 신화 unbroken myth를 거부한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는 궁극적인 것을 궁극적으로 여기고 어떤 종류의 우상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실재이고 그 외에 하나님의 심오한 구조와 본질을 드러내는 어떤 상징체계도 궁극적 실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화는 신화이고 상징은 상징일 뿐, 그것이 궁극적 실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화는 불확실성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화는 상징을 이용하기 때문에 해석되어야 합니다. 상징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해석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서 상징이 나타내고 있는 실재도 바뀔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재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감각이 바뀌는 것이지만 인간의 처지에서는 실재가 바뀌는 것과 똑같습니다. 둘째로 신화는 실재를 향한 길을 제시해 주지만 누구나 다 그 길을 통해 실재를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상징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화는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게 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하지만 신화의 불확실성이라는 요소 때문에 심한 반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인 것도 있고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경향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반동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화 자체를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성경을 믿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경의 의미를 의도를 파악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성경의 문장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신화를 우상화하는 것은 신화를 통해서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고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데 신화를 아는 것 자체만으로 멈추는 것을 뜻합니다. 신화는 궁극적 실재를 향해 열린 길인데 그 길을 통과하지 않고 그 길에 멈춰 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화에 나타나는 상징을 기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징 언어를 기호 언어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화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겠다는 것입니다. 상징 언어를 기호 언어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대폭 축소시켜 버립니다. 이러면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틸리히가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하고 그래서 신화는 깨진 신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19세기까지는 신화에 나타난 상징과 사실을 구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화를 깨뜨린다는 것은 신화 안에 나타난 상징과 사실을 구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신화 자체를 우상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화가 가진 불확실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깨진 신화는 좁은 길 험난한 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깨진 신화를 통해서 그리스도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실이 아니라요. 물론 그 삶의 의미는 사실과 무관한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삶의 의미입니다. 

 

참고도서: 폴 틸리히 "문화의 신학", 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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