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신학노트] 현대 물리학과 신학의 관계_하이젠베르크 "물리와 철학" 11장을 기반으로

설왕은 2021. 6. 1. 22:45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양자 물리학자입니다. 1932년에 양자물리학의 창시 등의 공을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 우라늄 계획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원자폭탄 생산이 어렵다고 밝혀서 나치는 원자폭탄 개발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후에도 계속 독일에 머무르면서 1946년부터 1970년까지 막스 플랑크 천체물리학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습니다. 1957년에는 독일의 핵무장을 반대하는 <괴팅겐 선언>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와 철학"이라는 얇은 책을 썼습니다. 이 외에도 저서가 몇 권 더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리와 철학의 관계를 설명하고 물리학이 철학에 미친 영향 혹은 물리학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물리와 철학"은 비슷한 책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양자역학을 처음 연구하고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한 노벨상 수상자 하이젠베르크가 썼으니 이 책의 권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중에서 저는 11장 "인류 사상의 발전에서 현대 물리학의 역할"을 기반으로 현대 물리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11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인류 사상의 발전에서 현대 물리학의 역할을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진보 과정에서 함부로 무기를 사용하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

둘째, 개방성을 통해 새로운 통합과 균형의 희망을 제시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첫째는 길게 설명을 안 해도 될 것 같고요. 현대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핵무기가 개발되었기 때문에 나라 간의 분쟁이나 타협이나 조정 단계에서 지나친 갈등과 긴장이 발생하면 인류 멸망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한 조건이 인류 사상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직접 끼친다고 말하기는 좀 어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둘째 역할을 다른 말로 하면 현대 물리학은 고전 물리학의 경직된 틀을 깨는 데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직된 틀은 시공간이라는 틀, 물질이라는 개념, 인과율입니다. 그 외에도 다른 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시공간이라는 틀은 고전 물리학에서는 고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덕분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은 고정된 틀이 아니라 공간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며 공간도 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량에 따라서 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질이라는 개념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물질은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였지만 양자 물리학에서는 물질의 파동성 때문에 물질은 존재하기도 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관찰자에 따라서 물질의 존재 성질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인과율은 뉴턴에 의해서 극도로 발전하고 다윈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 물리학의 세계는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있는 세상입니다. 원인에 따라서 결과가 정해집니다. 필연적인 세상이지요. 그런데 가끔은 이 필연성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 관계가 애매한 경우가 있는데요. 다윈은 이것이 우연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필연적 연결 고리가 깨지는 원인을 우연이라고 밝히면서 인과율이 완성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양자 물리학은 이것을 무너뜨립니다. 미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인과율을 말하기 곤란합니다. 원인 없이 결과가 발생하고 어떤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더라도 그다음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인과율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결론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런 19세기의 경직된 틀을 해체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247)

 

 

19세기 고전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것 같았는데 현대 물리학은 기존 물리학의 경직된 틀을 깨버리고 개방성을 지니도록 이끌었습니다. 시공간과 물질이 불확실한 것이라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어떤 것도 없지요. 시공간 안에 있지 않은 물질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물질이라는 개념조차도 모호해졌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자연 세계도 이와 같은 불확실함과 모호함이 가득 찬 곳이라면 사상이나 신념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신념 때문에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던 20세기 전반기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같은 일을 막을 수 있는 기본 체계를 제공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 물리학은 신이나 종교를 다시 우리의 삶으로 불러올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6세기부터 시작된 자연과학의 지나친 부상이 종교를 우리 삶의 뒷전으로 밀어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기독교를 인간들의 삶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시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시도는 분명 전통적인 기독교로부터 도피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이런 시도를 한 사람들은 신의 계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파했다. 하나는 성경을 통한 계시고, 다른 하나는 자연이라는 책에 기록된 계시다." (p.243)

 

자연과학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으로 신을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고자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선험적으로 알고 있던 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수정해야 했습니다. 자연과학의 신봉자는 자연이야말로 진실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권위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은 인간이 아닌 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전통적 종교의 신봉자는 물질에 집중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무시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쪽 다 일리가 있지만 자연과학의 신봉자들의 말에 좀 더 무게가 실리게 된 것은 자연을 이용해서 기술과학이 발전되고 이를 통해 인간이 힘을 얻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과학의 진보는 물질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처럼 보였다. '효용'이 당대의 표어가 되었다." (p.246)
"이런 틀 속에서 가장 설 자리를 찾기 힘든 개념은 오늘날에 와서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여겨지는, 과거의 고전 종교의 대상들이었다." (p.246-247)

 

 

현대 물리학이 닫힌 체계가 아닌 열린 체계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종교는 설 자리를 다시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현대 물리학을 아는 사람들에 한해서입니다. 현대 물리학을 잘 모르고 고전 물리학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 신이 들어설 자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고전 물리학의 세계관을 가지고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는데 고전 물리학의 경직된 틀 속에서 신의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들고 신이 모든 인과 관계를 조정하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이것은 오해입니다. 현대 물리학은 불확실하고 개방된 체계 속에서 신에 대해서 다시 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는데 확실하고 닫힌 체계를 제공하는 고전 물리학에서는 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신을 들이밀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고전 물리학의 체계에서 나타나는 신은 신이라기보다는 물질세계의 원리인데 신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언어에도 주목을 합니다. 

 

"또한 현대 물리학의 발전과 분석에서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지식을 확장하고 할 경우에는 모호하게 정의되어 있는 자연언어의 개념 쪽이 제한된 일군의 현상으로부터 이상적인 경우를 상정해 유도해 낸 과학 언어의 엄밀한 용어보다 안정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p.249)

 

 

 

고전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인간은 전에는 갖지 못했던 힘을 얻었지만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정의된 개념들은 인간의 현실을 반영하는 데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종교를 믿고 종교를 표현하는 데에는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언어가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본질적인 안정성을 유지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현대 물리학이라는 경험 이후에는 정신이나 영혼이나 생명이나 신과 같은 개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19세기와는 달라질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p.250)

 

종교의 언어는 모호함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정신, 영혼, 생명, 신, 인간, 사랑 같은 단어는 매우 애매모호한 단어로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19세기 고전 물리학 세계관을 가진 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단어를 정의하고 싶어 합니다. 신은 ~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종교는 아편이다, 인간은 유전자의 번식을 위한 로봇이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정의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과학의 언어는 오히려 인간의 현실과 맞닿아 있지 않다고 하이젠베르크가 지적합니다. 

 

사실 현대 물리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현대 물리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사상의 발전도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사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 신, 구원, 생명, 사랑과 같은 단어들을 훨씬 더 자연스럽게 쓰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을 배우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주저하지 말고 이런 단어들을 더 자연스럽게 써야 합니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아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저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에서는 상징과 비유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런 언어야말로 현실 세계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 특별히 고전 물리학의 언어는 인간의 현실 세계를 표현하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종교의 언어, 상징의 언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고전 물리학의 언어보다는 훨씬 더 확장성이 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종교의 언어를 고전 물리학의 언어로 이해하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유가 두려워서 감옥의 문을 열고 스스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되겠지요. 사람은 자유를 누리며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6세기부터 시작해서 약 300년 간 과학과 종교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과학이 종교의 영역을 침공하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도 과학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종교와 과학은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21세기에 인류의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대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종교와 과학이 같이 협력해야 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종교와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의 갈등과 반목을 지양하고 함께 손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종교는 과학의 손을 잡고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가야 합니다. 

 

종교와 과학이 손을 잡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는 앞날을 그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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