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단편소설

[세계단편소설] 프란츠 카프카 "변신"_슬퍼하는 이가 없어서 슬프다

설왕은 2022. 6. 28. 09:00

카프카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소설가이다. 솔직히 실존주의라는 범주가 너무 넓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존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실존주의 작가라고 하니 그대로 받아들여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 이런 게 실존주의구나'라고 알게 될 수도 있는 소설이다. 

 

카프카는 1883년에 태어나서 1924년에 죽었다. 독일 사람이고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재학 중에 소설가로 변신했다. 부유한 유대 상인이었지만 독일 사람이기도 했던 카프카는 아버지와의 사이도 좋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불안과 소외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불안과 소외가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삶 자체가 실존주의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면 이러한 불안과 소외가 좀 줄어들었을 텐데, 카프카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결핵으로 인해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변신'은 내가 정말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읽은 소설이다. 실존주의 대표 작가의 대표 소설이라서 예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사람이 벌레가 된다는 기본 줄거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안 그래도 인간의 존엄성이 수시로 무너지고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다른 존엄성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게 명확한 답을 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벌레가 되는 이런 식의 소설은 나의 정신 건강에 해로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삶은 벌레 같은 느낌일 때가 있는데 굳이 벌레로 변신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전에 초반 몇 쪽을 읽다가 포기했다. 그랬다가 용기를 내서 다시 도전했다. 일단 주인공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는 것까지는 읽었고 그다음부터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름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읽었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었는데 어떻게 벌레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그냥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출근을 할 수도 없었고 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었는데 다시 사람이 될 궁리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이 실존주의 소설로 분류될 것이다. 그레고르는 그냥 산다. 방 밖으로 나갈 시도도 하지 않는다. 나가봐야 커다란 벌레가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가족으로부터도 공격당하는 그레고르는 그냥 방 안에 머물면서 가족들에게 최대한 혐오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의 여동생이 먹을 것도 주고 방도 청소하고 정리해 주면서 그레고르는 돌봐 주는데 여동생이 들어올 때마다 그레고르는 눈에 띄지 않도록 소파 밑에 숨는다. 벌레로 변한 그가 할 수 있는 배려이다. 영문을 알 수 없이 어느 날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돌보던 가족들도 그를 되돌릴 방도를 찾지 않는다. 군데군데 암시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그레고르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가 벌레가 되어 버려서 돈을 벌 수 없자 가족들은 그레고르 없이 살아갈 방법들 찾아서 실천한다. 모두 각자의 삶에 집중할 뿐이다. 벌레가 되어서 가족들에게 효용 가치가 없어져 버린 그레고르는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골치 아픈 벌레 취급을 당한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대우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다 희망을 버린 채 그저 생존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읽었다. 읽는 사람에게까지 희망을 뺏을 수는 없지 않은가. 희망을 가지고 읽는 것은 독자의 자유다. 

 

 

그레고르는 어떻게 될까?

 

나는 그레고르가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기를 기대했다. 원래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레고르는 벌레인 상태로 죽는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벌레가 된다는 것이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벌레가 죽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충격을 주었던 것은 그레고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자세였다. 

 

할멈은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이 멀찍이 서서 빗자루로 그레고르의 시체를 쑥 밀어 보였다. 부인은 할멈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자,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군."
하고 잠자 씨가 말하며 성호를 그었다. 나머지 세 여자들도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마치 골치 아팠던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사람들은 그레고르의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벌레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죽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그저 일어나는 사건 자체만을 받아들이고 그 이전과 그 이후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사건은 일어나고 그 사건을 해결할 뿐이다. 가능하면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소설 속 그레고르의 가족은 놀라기는 하지만 크게 슬퍼하지는 않는다. 슬픈 일에 슬퍼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슬퍼할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시대여서 그랬을까? 슬퍼하지 않는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이 삶에 대한 큰 희망이나 기대가 없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카뮈의 이방인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엄마의 죽음에도 덤덤했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그레고르의 가족은 그레고르의 죽음을 슬픔 없이 받아들인다. 또 생각이 나는 소설이 김승옥 작가가 쓴 "서울, 1964년 겨울"이다. 거기서도 사람이 죽는데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미루어 놓은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이 소설이 위대한 소설이고 기념비가 될 만한 소설이라고 해도 나는 읽고 난 후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카프카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나의 이런 반응을 알았다면 카프카는 기뻐했을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을 이끌어내고 싶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삶에서 느꼈던 소외감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냥 삶은 이런 것이라고 밝히고 싶었을까? 그레고르는 단순한 벌레가 아니라 사람 같은 벌레 또는 벌레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존재가 죽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슬퍼하는 사람이 없어서 슬픈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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