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박경리 "불신시대"_한 발자국 더 가까이

설왕은 2022. 7. 21. 09:00

박경리의 "토지"를 읽어보고 싶으나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열두 권짜리 장편 소설. 아직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긴 이야기가 필요할까? 그래도 다들 추천을 하는 명작이라서 읽어보고 싶기는 한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작하면 과연 끝을 낼 수 있을까?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나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열두 권을 읽으려면 열심히 읽어도 한 달은 걸릴 텐데, 그 정도 가치가 있을까? 좋은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의미를 전달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면에서 좋다는 것이지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사상과 철학이 나에게 도움을 줄까? 여러 가지 의문과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토지"는 "죽기 전에 읽어야 할 텐데 읽을 수 있을까?"라는 제목을 가진 책 목록의 1번 책이다. 그래서 박경리의 "불신시대"를 읽어보았다. 탐색전이라고 할 수 있다. 탐색전이 끝나면 "토지"의 세계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완전히 돌아설 수도 있다. 

 

"불신시대"는 1927년에 태어난 박경리 작가가 1957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서른 살쯤에 쓴 작품. 지금은 서른 살이면 대체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을 어린 나이이지만 그 당시에 서른 살은 꽤 나이가 든 축이었을 것이다. 일단 제목이 신선하지는 않다. 불신시대라.. 무엇을 믿지 못하는 시대일까?

 

박경리의 "불신시대"는 불행하게 남편과 아들을 잃은 진영이라는 여인이 겪는 믿을 수 없고 비정하고 무례한 세상에 대한 경험을 담고 있다. 특별히 자신의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고 자신들이 믿는 신을 통해 사람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종교인들과 종교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담고 있다. 종교인이라면 어둡고 차갑고 무서운 현실에서 신앙 시대를 만들어야 할 텐데 그들 때문에 이 세상은 더욱더 희망이 없는 불신시대가 되었다고 작가는 고발한다. 

 

9.28 수복 전야에 진영의 남편은 폭사했다. 

 

 

"불신시대"는 비극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진영의 남편은 죽었다. 아마도 가장 불행한 죽음이 아닐까 싶다. 나이 들어 죽은 것도 아니고 병들어 죽은 것도 아니고 총에 맞아 죽은 것도 아니다. 총에 맞아 죽었으면 시신이라고 거둘 수 있을 텐데, 폭사는 시신을 거두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아닌가. 남편만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었다. 진영의 아이는 더 기구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아이가 앓다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길에서 넘어지고 병원에서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진영으로서는 전쟁이 빚어낸 하나의 악몽처럼 차차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의사의 무관심이 아이를 거의 생죽음시킨 것이다. 의사는 중대한 뇌수술을 엑스레이로 찍어보지 않고, 심지어는 약 준비조차 없이 시작했던 것이다. 마취도 안 한 아이는 도수장 속의 망아지처럼 죽어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를 갖다 버린 진영이었다. 

 

남편이 죽고 아이까지 죽은 상황에서 진영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제는 이리도 비참하지만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문제였다. 누가 과연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진영은 성당에 간다. 진영의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지만 진영과 어머니 모두 성당에 간다. 진영과 진영의 어머니를 성당에 데리고 가는 갈월동 아주머니는 이렇게 소곤거린다. 

 

천주님이 계신 이상 우리는 불행하지 않다. 천주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주어 너를 부르신 거야. 모든 것이 다 허망한 인간 세상에 다만 천주님만이 빛이 된다. 

 

 

그리고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한 진영. 그러나 진영은 성당에서 삶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미사에 참석하는 자신의 모습도 어색하고 성가대의 노래도 어설프게 들리고 미사가 끝날 때쯤 돌아가는 연금 주머니도 눈에 거슬렸다. 성당에서 문수를 편안하게 해 주고 자신도 평안을 찾으려고 한 진영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어느 날 집에 멍하니 앉아 있던 진영과 어머니에게 시주를 받으러 중이 찾아온다. 그 중이 그다지 믿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으나 진영의 어머니는 중이 가고 난 후에 진영에게 문수를 절에 올려주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진영은 절에 찾아가서도 심하게 상심하고 돌아온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게 따르는 중들의 행동에 환멸을 느끼면서. 최소한의 돈으로 문수를 위한 행사를 진행하던 진영과 어머니는 늙은 중에게 "댁 같으면 중이 먹고 살갔수"라는 말을 듣는다. 

 

모든 괴롬은 내 속에 있었다. 모든 모순도 내 속에 있었다. 신도, 문수의 손결도 내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곳에도 실제 있지는 않았다. 나는 창기처럼 절조 없이 두 신전에 참배했다. 그리고 제물과 돈을 바쳤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문수와 나의 중계를 부탁한 신에게 주는 수수료였는지도 모른다. 그 수수료는 실제에 있어서 중의 몇 끼의 끼니가 되었다. 결국 나는 나를 속이려고 했다. 문수는 아무곳에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희한한 결론에 도달한다. 어쩌면 보통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다다르는 결론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돈이 최고라는... 성당이고 절이고 다 돈 때문에, 먹고살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진영은 문수의 사진과 위패를 모셔 둔 절에 찾아가 그것을 달라고 요구한다. 사진과 위패를 돌려받은 진영은 성냥으로 불을 붙여서 위패와 사진을 태워버린다. 소설이 끝이 나지만 진영의 불신시대는 시작된다. 

 

겨울 하늘은 매몰스럽게도 맑다. 잡나무 가지에 앉힌 눈이 바람을 타고 진영의 외투 깃에 날아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잡나무를 휘여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었다. 

 

 

 

진영이 어떻게 저항할지 잘 모르겠다.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남아 있으니 항거할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 방법은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간에 '신앙'은 아닌 것이다. 진영이 왜 불신시대를 살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는 소설 같다. 진영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종교에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이 올바른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종교가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진영은 남편도 아이도 허망하게 보냈는데, 이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을 때까지 이 쓰라린 추억을 어떻게 안고 살아갈 것인지, 그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궁금하다. 박경리 작가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지. 아마도 다른 작품에서 그 방법들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토지"가 나를 부른다. "불신시대" 덕분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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