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황순원 "필묵장수"_버선과 매화

설왕은 2022. 12. 17. 18:50

황순원의 "필묵장수"는 1955년 "현대문학"에 처음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데 필묵장수로 나온 주인공 서노인의 삶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었다. 필묵장수는 말 그대로 붓과 먹을 팔러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지금이야 필묵장수를 찾을 수 없지만 1950년대만 해도 필묵장수가 꽤 있었나 보다. 

 

 

서노인은 원래부터 필묵장수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 글씨공부도 많이 하고 묵화도 배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배운 것으로 통 빛을 못 봐서 결국은 생계를 위해서 필묵장수로 나섰다. 주인공 이름부터 서노인이니 얼마나 그 일을 오래 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50년대라고 하지만 필묵장수가 잘 될 리가 없다. 그러니 서노인의 삶은 궁핍했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 붓과 먹을 팔러 다니는 나이 든 노인에 대한 대우는 좋을 리 없었다. 그래도 서노인을 불쌍하게 여기고 물건도 팔아주는 사람이 가끔 있었다. 서노인은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글씨도 써 주고 사군자 같은 묵화도 그려 주곤 했는데 그리 신통하지 않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면 필묵을 파는 서노인은 어느 날 주문진 근처에서 비를 만나 한 집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늙은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아들이 일본으로 징용에 뽑혀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그렇게 일본으로 간 이후에 그 여인은 거지 하나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노라고 말하며 서노인의 양말이 낡은 것을 보고 버선 한 켤레를 지어 주었다. 서노인은 그 여인에게 받은 호의에 매우 감동하여 버선을 신지도 못하고 간직하고 다닌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그 여인의 안부와 아들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노인은 종종 들르던 샛골 마을에 가서 늙은 동장의 집에 머문다. 습관처럼 매화를 하나 그려서 하룻밤 재워준 신세를 갚으려는 서노인은 자신이 그리는 매화 그림에서 뭔가 특별함을 느꼈다. 서노인은 그 그림을 가지고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갔다. 원래는 동장에게 주려면 그 그림을, 서노인은 주문진에 사는 여인에게 주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서노인은 그 여인이 살던 마을로 찾아갔지만 그 마을은 6.25 사변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어느 화창한 봄날에 서노인은 샛골 마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서노인의 괴나리봇짐에는 그의 유서가 들어 있었다. 소설은 다음과 같은 글로 마무리된다. 

 

펼쳐 보았다. 돈 얼마큼과 아직 한 번도 신지 않은 진솔 버선 한 켤레가 나왔다. 그리고 거기 종잇조각이 있어, 이런 뜻의 글이 적혀 있었다. 
여기 들어 있는 돈으로 장례를 치러달라. 그리고 그때에는 수고스러운 대로 여기 같이 들어 있는 버선을 신겨달라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 하나가 이 서노인의 주제와는 통 어울리지 않는 흰 버선을 들고 뒤적이다가 그 속에 곱게 접혀 있는 종인 한 장을 끄집어냈다. 
펴보니, 언젠가 동장네 집에서 그려가지고 미친 사람모양 밖으로 뛰어나간 일이 있는 그 매화였다. 

 

 

단편 소설은 짧아서 사건이 빠르게 전개되어서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집중이 된다거나 재밌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황순원의 필묵장수는 재밌게 읽었다. 일단 서노인이 참 불쌍했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 공부도 많이 하고 묵화도 배운 서노인은 아버지의 말을 잘 듣고 성실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서노인에게 글씨 공부를 시키고 묵화도 가르친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는데 서노인은 재능이 없었다. 재능이 없었으면 중간에 그만두겠다고 했을 만도 한데 서노인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계속 글씨 공부를 하고 묵화도 배운다. 결국 아버지가 죽으면서 자기가 욕심이 컸던 것 같다고 이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서노인에게 말한다. 그 이후에 서노인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 했는데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가 친 사군자를 팔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림을 통 팔지 못하자 필묵장수로 나선 것이다. 서노인이 불쌍했던 이유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좋아 보이는 일에 집착했던 그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말을 잘 듣던 착한 아이였던 서노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개화기에 글씨 공부와 묵화가 웬 말이란 말인가. 거기에 재능이 있다고 한들 잘 살아갈 수 있었을까? 게다가 서노인은 재능까지 없었다. 그런데 서노인은 필묵장수를 하면서도 글씨를 쓰고 묵화를 쳤다. 사람은 참 착한데 영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같아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참 불쌍했다. 나도 그런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들면서...

 

필묵장수 서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일흔 살이 된 필묵장수 서노인에게 어떤 사건이 생길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장사하다가 어느 날 일어나지 못하면 죽는 것 아닐까?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소설에서 별일 같지 않은 별일이 생긴다. 한 여인이 서노인에게 버선을 지어 준 것이다. 

 

밤 깊기까지 버선 한 켤레를 다 지었다. 그것을 신어보는 서노인의 손이 절로 떨렸다. 여인이 이렇게 버선을 지어주는 것은 그것이 머언 타향에 가 생사를 모르는 자기 아들을 위한 선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서노인으로서는 칠십 평생에 처음 맛보는 따뜻한 정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부터 서노인의 매화 그림은 목표가 생긴다. 그 여인에게 자랑스럽게 줄 만한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마음이 생긴다. 서노인이 칠십 년을 살면서 그런 호의를 처음 맛본다고 했는데 사실 그 호의는 대단한 호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여인은 괜찮은 천으로 하룻밤에 버선 한 켤레를 지은 것이었다. 가격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아주 비싼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서노인은 한평생 그렇게 귀한 선물을 처음 받아보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버선을 신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 사는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이 소설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비극인 것 같으면서 마지막은 그래도 좀 해피 엔딩인 것 같아서, 결국은 좀 좋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극은 아닌데 그래도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죽을 때까지 간직할 만한 선한 마음을 만났고 그 마음을 간직하고 죽었다는 생각이 드니 다행인 것 같았다. 사람의 선한 마음을 만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많지 않은가. 

 

많이 슬픈데 그래도 좀 따뜻한 소설. 황순원의 "필묵장수"에 대한 나의 한줄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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