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황순원 "독 짓는 늙은이"_독을 품었던 늙은이

설왕은 2022. 7. 14. 09:00

황순원 작가의 "독 짓는 늙은이"는 말할 것도 없이 수작이다. 정말 뛰어난 작품이지만 읽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일단 너무 슬프다. 이렇게 아픈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발생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희망을 품기도 어렵다. 독 짓는 늙은이인 송 영감은 아마도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슬픈 일만 잔뜩 생기다가 송 영감이 죽는 이야기인데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1950년 2월에 발표된 이 작품은 발표된 시기마저 슬프다. 조금 있으면 한국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독 짓는 늙은이"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 제목을 들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 poison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늙은이는 누군가를 독살하기 위해서 독을 만드는 늙은이일까? 그러나 두 쪽만 읽으면 제목에 나온 독은 '항아리'와 같은 질그릇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읽다 보면 일부러 헷갈리게 "독 짓는 늙은이"라고 제목을 지은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독은 그릇일 수도 있고 독은 사람을 죽이는 성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쩌면 "독 짓는 늙은이"는 독을 짓다가 독이 생긴 늙은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제목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욕으로 시작한다.

이년! 이 백 번 쥑에두 쌀 년! 앓는 남편두 남편이디만, 어린 자식을 놔두구 그래 도망을 가? 것두 아들놈 같은 조수 놈하구서... 그래 지금 한창나이란 말이디? 그렇다구 이년, 내가 아무리 늙구 병들었기루서니 거랑질이냐 할 줄 아니? 이녀언!


독을 품은 늙은이의 욕설과 함께 소설은 시작한다. 아내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송 영감의 말로만 봐서는 아내가 정말 나쁜 짓을 저질렀고 송영감이 이런 욕을 할 만한 상황이다. 오죽하면 아내가 떠났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송 영감이 직업이 없거나 자리에 누워있을 정도로 몸이 안 좋은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일단 희망을 가지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독을 짓는 늙은이니까 독을 지어서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희망과는 달리 상황은 순리대로 돌아간다. 송 영감이 나이 들고 병이 들었고 조수와 아내는 눈이 맞아 달아났고 어린 자식은 키울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찾아와 어린 아들을 다른 집에 보내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런 상황에서 생길 비극을 조금이라도 줄일 순리인 것이다. 처음에는 극구 반대하던 송 영감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어린 아들을 다른 집에 보낸다. 그리고 자신은 뜨거운 가마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송 영감은 다시 일어나 가마 안쪽으로 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지금의 온기로써는 부족이라도 한 듯이. 곧 예삿사람으로는 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송 영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열어젖힌 곁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늦가을 맑은 햇빛 속에서 송 영감은 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가 찾던 것이 예 있다는 듯이. 거기에는 터져나간 송 영감 자신의 독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송 영감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단정히, 아주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 해서 그 자신이 터져나간 자기의 독을 대신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전에도 이 소설을 읽고 느낌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송 영감이 죽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모호해서 좀 더 자세하게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 가지 이유이고. 사실 송 영감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부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살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미 죽을 것 같은데 죽고 싶은 자리에 간 것일까? 아마도 후자일 것 같다. 이미 송 영감은 가망이 없었다. 왜 가망이 없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병명도 나오지 않고 의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변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송 영감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송 영감의 아내가 어린 자식을 남겨 두고 도망간 이유는 그 운명에 대한 인식으로 인한 것이었다. 송 영감이 제대로 독을 만들 수 없었고, 그 독이 가마 안에서 구워지다가 다 터져버린 것은 마치 송 영감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시계 알람 같은 것이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송 영감의 어린 아들을 다른 집에 보내자고 한 것도 그가 끝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 영감만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다가 결국 자신이 만든 독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쓰러진 후 깨닫는다.

다음 날 송 영감이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자기네 뜸막 안에 뉘어 있었다. 옆에서 작은 몸을 오그리고 훌쩍거리던 애가 아버지가 정신 든 것을 보고 더 크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송 영감은 저도 모르게 애보고, 안 죽는다, 안 죽는다, 했다. 그러나 송 영감은 또 속으로는, 지금 자기는 죽어가고 있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슬픈 이야기다. 그러나 정말 있음 직한 이야기이다. 독 짓는 늙은이는 나름 기술이 있었지만 급변하는 세상에서 밥벌이조차 쉽지 않았다. 그 당시에 그런 사람이 한둘이었을까. 분명히 좋은 기술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도태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로 가득 찬 소설인데, 잘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송 영감은 아내를 욕했지만 아내도 살 길을 찾아 떠난 것이고 아버지로부터 어린 자식을 떼어내려던 앵두나뭇집 할머니도 그 아이의 살 길을 찾아준 것이고 가마 근처에서 몸을 녹이고 있던 거지들도 살려고 그런 것이다.

독을 짓는 늙은이가 독을 품었지만 결국 자신이 품었던 독을 뱉어 버리고 마지막에 경건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이한다. 송 영감 자신에게 있던 독이 빠졌다는 의미에서 해피 엔딩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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