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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_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된다고?

설왕은 2023. 1. 6. 09:00

https://youtu.be/w_QbOY4vixI

 

꽤나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베스트셀러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제목 때문에 끌렸다. 호모 데우스라...  신인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적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다음을 예언하겠다는 것 같은데 꿈이 거대해서 좋다.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호모 사피엔스 다음에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호모 데우스의 부제는 "미래의 역사"이다. 미래는 예측해야 하는 것이라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한데 이렇게 유명한 작가의 책은 제목은 아무렇게나 지어도 큰 상관이 없다. 모순이면 어떠한가, 작가가 유명한데. 다들 작가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펼 것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다. 일단 책을 펼치기 전에 상당히 책이 낡아서 깜짝 놀랐다. 조금 있으면 둘로 갈라질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유명한 책이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명한 책이라고 해서 다 이렇게 낡은 것은 아니다. 철학 서적은 아무리 유명해도 이렇게 낡지 않는다. 책이 낡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빌리기도 열심히 빌렸지만 읽기도 열심히 읽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책이 낡았다는 것은 내용이 재미있다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책을 읽기 시작하니 이 책의 낡음이 이해가 되었다. 흥미로운 내용을 아주 쉽게 적어 놓았다. 그리고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놀라웠다. 작가 소개를 열심히 읽지 않고 책을 읽다가 "도대체 하라리는 전공이 뭘까?"라는 질문이 절로 생겼다. 저자 소개를 보니 역사학 교수이다. 중세 전쟁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시 역사 전공자들은 아는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읽었다.

 

차례는 다음과 같다.

제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제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제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이 책의 제목은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이지만 차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를 자꾸 언급하는 이유는 인류가 글자로 남긴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인류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예측한다.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 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39)

 

구체적으로 따지려면 한 문장 한 문장 다 따질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단순화된 논리는 시원시원한 맛이 있다. 그리고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논리를 제공하므로 멈추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인류가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전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제1세계의 현재이지 전 세계의 현재는 아니다. 누군가는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누군가는 그 번영을 위해서 아직도 이용당하고 있다.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서 식이요법을 하지만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고 있다. 평화라... 2022년에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평화라는 단어는 하늘의 별과 같은 단어이다. 하라리의 관점은 제1세계의 백인 남자의 관점이다.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사람은 불멸을 꿈꿀 수 있다. 그러나 삶이 고통스러운 자에게 불멸은 영원한 지옥을 의미할 뿐이다. 비판은 여기까지만 하자. 하라리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니까... 일단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는 것도 괜찮다. 

 

신성을 획득한다는 것이 비과학적인 말 또는 매우 엉뚱한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신성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성은 모호한 형이상학적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전능함과 똑같은 말도 아니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한다고 말할 때 그 신은 성경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보다는 그리스 신들 또는 힌두교의 천신들을 말한다. 우리의 후손들은 제우스와 인타라처럼 약점, 꼬인 구석, 한계를 가질 테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차원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74)

 

 

하라리가 말하는 신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문단이다. 신성은 형이상학적 성질이 아니고 전능함도 아니다. 신성을 얻는다는 것은 더 큰 차원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시야를 넓힌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다. 인간의 시야는 점점 더 넓어져왔다. 다윈이 정말 큰 역할을 했는데 인간의 시야를 100년 정도 수준에서 100억 년 정도로 넓혔다. 양자역학도 큰 역할을 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것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하라리의 관점에서 신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앞으로 인간이 이루어낼 과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했던 일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감히 '신의 영역'이라고 할 정도까지 인간의 시야와 행동반경이 커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아주 지당한 말씀이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평소에 궁금하던 질문을 하나 해결했다. 워낙 내용이 방대하고 이런저런 다양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어서 평소에 궁금한 것이 많았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답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하라리가 교수지만 책에 나온 내용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그가 모든 분야에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의 주장에 따른 근거를 끌어오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지나치게 현혹되서도 안 된다.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질문 중 하나는 "왜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에 잔디를 키울까?"였다. 한국 사람들은 집에 마당이 있다고 잔디를 심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텃밭을 꾸밀 때가 많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잔디를 기른다. 잔디는 보기는 좋지만 관리하기 힘들다. 금방 자라서 정기적으로 깎아 주어야 하고 당연히 잡초도 자라고 관리를 잘 못하면 금방 죽기도 한다. 

 

개인의 집과 공공건물 입구에 잔디를 심는다는 생각은 중세 말 프랑스와 영국 귀족들의 저택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근대 초기에 깊이 뿌리내려 귀족을 상징하는 표식이 되었다. (93)

 

하라리는 중세 역사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사람들은 부유한 귀족이 되고 싶은 것이었고 잔디는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다. 

 

하라리는 성서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브는 과연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찾아봐도 제대로 말해 주는 곳이 없어서 궁금했는데 하라리에 따르면 이브는 셈족 언어에서 '뱀' 또는 '암컷 뱀'을 뜻한다고 한다. 이거는 좀 더 알아보고 싶기는 한데, 그래도 이브의 뜻이 뱀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창세기>의 저자들이 이브의 이름에 원시 애미니즘 신앙의 잔재를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그밖에 다른 모든 흔적은 용의주도하게 감추었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뱀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신이 무생물 물질로 창조했다. 뱀은 우리의 시조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거역하라고 우리를 유혹하는 존재이다. 애미니즘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도 동물일 뿐이라고 생각한 반면, 성경은 인간이 특별한 창조물이며 우리 안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은 곧 신의 권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실제로 파충류에서 진화했음을 알았을 때, 근대 인류는 신을 거역하고 신의 말에 더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신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았다.(114-115)

 

 

논리가 너무 시원하게 전개되어서 쭉 따라가게 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살펴보면 반박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브'라는 단어가 뱀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글을 전개하는 하라리의 말솜씨가 대단하다. 

 

하라리는 인간이 알고리즘이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주장이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데 이 주장의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하라리가 알고리즘 이론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주장이다. 인간에게 알고리즘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알고리즘 이론이야 21세기 최신 이론이 많이 있겠지만 이와 같은 주장 자체는 내가 볼 때는 19세기 기계론적인 주장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정확한 인과 관계 속에 있는 것이었으니 알고리즘이 잘 작동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라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정의는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복잡한 알고리즘' 정도일 것 같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생물학자들은 버튼을 누르고 차를 마시는 사람 역시 알고리즘이라는 확고한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은 자판기보다 훨씬 더 복잡한 알고리즘이지만, 그렇다 해도 알고리즘인 것은 확실하다. 인간은 차를 우릴 뿐 아니라 자신을 복제하는 알고리즘이다. (123)

 

인간이 어떻게 지구의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마음대로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우세종이 되었을까? 똑똑해서? 물론 그것도 하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나라는 질문에 하라리는 인간이 가진 '협력'의 능력을 중요한 것으로 꼽았다.

 

오늘날 인간이 이 행성을 지배한 것은 인간 개인이 침팬지나 늑대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손놀림이 민첩해서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여럿이서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기 때문이다. 지능과 도구 제작 능력도 분명 중요했다. 하지만 여럿이서 유연하게 협력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정교한 뇌와 능란한 손으로 우라늄 원소가 아니라 아직도 부싯돌을 쪼개고 있을 것이다. (187)

 

하라리는 협력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능력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확신 있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하라리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내세우는 전략은 협력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종교에 대하여 특별히 그리스도교나 유대교에 대해서 그다지 감정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성경이 사람들을 협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의 요소가 있다고 판단한다. 

 

유대인이 그리스인의 역사관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이 유대인의 역사관을 채택했다. 투키디데스 시대로부터 천 년이 흐른 뒤, 그리스인들은 야만인 무리가 침입해 오는 것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신의 처벌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성경의 세계관은 비록 오류이기 했지만 대규모 협력을 위한 더 나은 토대를 제공했다. (242)

 

21세기를 주도하기 위해서 아니 인류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이 주도권을 쥘 것인가? 똑똑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면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도권을 쥘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라리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사람이 주도권을 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사람이 자본도 가지게 될 것이고 권력도 쥐게 될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자신의 열정을 쏟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라리는 생명공학과 알고리즘을 강조한다.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이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의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378)

 

하라리가 생명공학과 알고리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책의 종반부에 이르러서 그는 데이터에 대한 종교적 신앙심을 드러낸다. '데이터교'라 할 만큼 그는 데이터가 세상의 미래를 끌고 갈 힘이라고 여긴다.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도 데이터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21세기의 기술로는 '인류를 해킹해' 나보다 나를 훨씬 더 잘 아는 외부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은 붕괴할 것이고, 권한은 개인들에서 그물망처럼 얽힌 알고리즘들로 옮겨갈 것이다. (451)

 

내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라리는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 수도 있지만, 그런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대해 연구하고 데이터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나 컴퓨터보다 더 잘 알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몽땅 외부에 넘기고 정밀 분석을 의뢰한다면 외부인이나 외부 시스템이 그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다. 

 

군사적,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엘리트 집단이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20세기와 달리, 21세기의 가장 효율적인 전략은 (비록 비정할지는 모르지만) 쓸모없는 3등 칸을 떼어내고 1등 칸만으로 빠르게 전진하는 것이다. 브라질이 일본과 경쟁하려면 수백만 명의 건강한 보통 노동자들보다 소수의 업그레이드된 초인간이 훨씬 더 필요할 것이다. (479)

 

여기서 하라리의 견해가 좀 이해가 안 된다. 분명히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차지하게 된 것은 협력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몇십 만 년 동안 효과를 발휘했던 능력이 이제는 바뀌었다는 것인가? 21세기에는 지금까지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 능력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가난한 대중들을 살리는 노력보다는 엘리트 위주의 빠른 성장을 통해 경쟁자를 눌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게 맞을 것 같다. 어차피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다 살아남을 수 없다면 경쟁을 통해서 이긴 자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진화론이 알려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논리와는 다르게 인간은 협력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함께 살아남으려고 노력함으로써 다른 종보다 우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것이 통했지만 21세기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라리가 제시하는 이유가 나름 있겠지만 앞에서 한 주장과 상충하는 것 같다. 

 

이런 신흥 기술종교들을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데이터교)이다. (482)

 

인류의 미래에 대한 하라리의 주장이다. 기술 인본주의를 따라가든가 아니면 데이터 종교에 빠지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 둘 다 생소한 개념이라 더 읽어 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만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우리가 욕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토대로 그것을 선택할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장면이 로미오가 누구와 사랑에 빠질지 결정하는 것이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결정을 내린 뒤에도 로미오는 언제든 결정을 철회하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어떤 종류의 희곡일까? 이것이 바로 기술 진보가 우리를 위해 생산하고자 하는 희곡이다. 기술은 욕망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때 구원해주겠다고 약속한다. (501)

 

 

앞부분에 있는 말에 동의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했다. 인본주의는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고 그것을 성취하라고 부추긴다. 물론 인본주의가 욕망만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칸트가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말이다. 인본주의는 인간에게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욕망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은 진화론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진화론 이후에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같은 사람들도 이성보다도 욕망에 집중했고 그러한 경향이 20세기를 주도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또한 내가 욕망하는 것을 얻었을 때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니고 기술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기술 인본주의이다. 기술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가 이기고 공산주의가 패한 것은 자본주의가 더 윤리적이어서도, 개인의 자유가 신성해서도, 신이 이교도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분노해서도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적어도 기술 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509)

 

데이터 처리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더 우월하다는 말인데 참신하다. 과연 그런지 한번 따져볼 만한 주장이기는 한데 그럴듯하기도 하다.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하라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1. 프로세서의 수를 늘린다. 
2. 프로세서의 다양성을 늘린다. 
3. 프로세서들 간의 연결을 늘린다. 
4. 현존하는 연결을 따라 이동할 자유를 늘린다. (518)

 

앞으로 데이터량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잘 처리하느냐가 인류의 과제가 될 것이라는 하라리의 전망이다. 인류에게 닥친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기후변화, 쓰레기 문제, 한정된 자원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하라리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데이터는 점점 쏟아지는데 이 데이터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미래의 주도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결국 데이터를 늘리고 처리 속도를 높이는 것은 협력의 문제 아닌가? 

 

인본주의는 경험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우리 안에서 찾음으로써 우주에 의미를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데이터교도들은 경험은 공유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고, 우리는 자기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실은 발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해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에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고리즘들이 그 경험의 의미를 알아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529)

 

흥미로운 주장이다. 삶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의미를 발견할 필요도 없고 발견할 수도 없으며 거대한 데이터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데 실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 수많은 데이터를 생산해내고 그 데이터를 통해 서로 연결한다. 그 데이터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데이터를 통해 서로 연결하기만 하면 거대한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지시를 내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를 추천해 주고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어떤 일을 하면 성취감을 느끼고 어떤 일을 하면 돈을 벌 가능성이 높은지 알려 줄 것이다.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추천해 주고 그 사람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의미를 찾을 필요 없이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 속에서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하라리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책을 마친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이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글쎄... 500쪽이 넘도록 자신감 넘치는 글로 독자들을 이끌었던 하라리는 마지막에 질문을 남기며 사라진다. 1번과 3번은 책에서 대충 답을 한 것 같고 2번은 잘 모르겠다. 그는 의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 자체를 잘 모르겠다. 의식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하라리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꽤 긴 지면을 통해서 주장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재밌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지식을 일관성 있고 흥미롭게 엮어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이룩한 과학적 성과는 그 양이 무척 많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들이 많은데 하라리의 설명은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너무 과감한 주장을 해서 반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호모 데우스가 된다고? 신은 없다고 믿는 하라리가 미래의 인간에 신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호모 데우스'가 멋있다고 생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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