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나

[철학하나] 하이데거의 "불안"_불안 is good?

설왕은 2023. 2. 28. 00:51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종만 옮김, 까치, 1998)

제40절 현존재의 한 탁월한 열어 밝혀져 있음인 불안이라는 근본적 처해 있음

p.251-260

 

하이데거는 불안을 "하나의 탁월한 처해 있음"(a state-of-mind which is distinctive)이라고 주장한다. 영어 번역과 한국어 번역이 많이 다른데 그만큼 하이데거의 철학 개념은 다양하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처해 있음'이라는 말은 일종의 정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처해 있음'이라는 말은 이 말에서도 대충 짐작할 수 있듯이 인간이 처한 상황이나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불안은 하나의 현상이다. 영어 번역에서는 '탁월한'이라는 의미보다는 눈에 띄는 정도로 번역했는데 '탁월한'이라는 번역도 괜찮은 것 같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불안에 대해서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불안은 인간을 개별화시키기 때문이다. (Sein und Zeit, 190) 그렇다면 개별화시키는 것이 왜 중요할까? 인간을 독립시켜야 인간은 세계-속에-존재로서 그들에 의해 요구되는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존재에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존재로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인간의 일상적 친근함을 깨뜨리는 기능을 한다. 인간의 보통 상태는 '빠져 있음'의 상태이다. 

 

빠져 있음에서는 분명히 실존적으로 자기 존재의 본래성이 닫혀버리고 내몰려버리지, 이러한 닫혀 있음은 단지 일종의 열어 밝혀져 있음의 결여태일 뿐이다. (SuZ, 184)

 

 

하이데거는 불안이 대상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불안은 대상이 없어야 진짜 불안이다. 불안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불안이 아니라 공포 또는 두려움이라고 불러야 한다. 공포나 두려움은 대상이 존재하는데 그 대상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즉 공포나 두려움이 발생할 때 인간은 세계 안에 있음이라는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더 강화될 수 있다. 두려움의 대상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 대상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것은 인간을 개별화시키는 데 실패한다. 즉 불안이 대상이 없다는 특성은 매우 중요한다. 대상이 없는 불안이야말로 인간을 개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대상이 없다는 말이 매우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데 하이데거도 어렵게 설명하고 있고 한국어 번역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기에 불안은 또한 거기에서부터 위협스러운 것이 가까이 다가오는 특정한 여기나 저기를 보지 못한다.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무 데에도 없다는 것이 불안의 '그것 앞에서'를 특징짓고 있다. (SuZ, 186)

 

여러 번 읽어 보아도 이해하기 힘든 문장이다. 이와 같은 문장이 가득하다. 

 

불안의 '그것 앞에서'에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데에도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세계내부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데에도 없다'는 이 적대성은 현상적으로, 불안의 '그것 앞에서'가 세계 그 자체임을 말한다. (SuZ, 186)

 

이 문장 역시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데에도 없다는 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불안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데에도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도 불안으로 인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데에도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불안은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주변에 있는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도 그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또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주변 환경 속에서 인지한다. 그러나 세계 속에서 다른 모든 존재와 맺고 있는 관계가 끊어진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갑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위치 또한 파악하기 어렵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게 된다. 불안은 인간을 이런 상황에 놓는다. 불안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다. 

 

세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타인들의 더불어 있음도 그렇다. 불안은 이렇게 현존재에게서, 빠져 있으면서 자신을 세계에서부터 그리고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버린다. 불안은 현존재를 그가 그 때문에 불안해하는 그것으로, 즉 본래적인 세계-내-존재-가능으로 되던져준다. (SuZ, 187)

 

그래서 하이데거는 불안할 때 느끼는 감정을 '섬뜩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불안도 일종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이런 식으로 하나의 개념을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섬뜩함은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주변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다가 그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자신의 위치마저도 파악이 불가능해진 상황은 소름끼치는 상황이다. 갑자기 우주 미아가 되어버린 듯한 섬뜩한 상황이다. 

 

불안 또는 섬뜩함은 특정한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존재 때문에 발생한다면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이 아니다. 특정 상황에서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한여름 오후에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불안이나 섬뜩함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불안이나 섬뜩함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소나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소나기는 그저 갑자기 쏟아지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소나기는 섬뜩함을 일으키고 인간을 다른 존재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들 안에서 존재하던 인간이 독립된 개인으로 떨어져 나오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는 기회가 발생한다. 물론 그런 기회가 발생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많은 경우 인간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시 빠져 있음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오직 불안에만 있는 하나의 탁월한 열어 밝힘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불안이 개별화시키기 때문이다. (SuZ,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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