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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_시간의 존재 이유

설왕은 2023. 8. 16. 09:00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는 다섯 번 정도 읽은 것 같다. 욕심껏 읽었던 이유는 첫째 레비나스를 이해하고 싶어서였고 둘째 그나마 다른 책보다는 훨씬 얇기 때문이었다.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는 "시간과 타자"라는 제목으로 네 번에 걸쳐 파리에 있는 카르티에 라탱 복판에 있는 장 발의 '철학학교'에서 1946-1947년에 한 강의를 속기로 기록한 책이다. 원래 1948년에 출판되었는데 아마도 절판되었다가 1979년에 다시 출판하면서 레비나스가 서문을 다시 썼다. 1948년에 나온 책과 다른 점은 30년을 더 공부하고 연구한 이후에 레비나스가 붙인 서문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30년 간 학문의 발전이 있었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고쳐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지만 레비나스는 고쳐 쓰는 일을 포기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최초의 기획 의도가 있었는데 고쳐서 쓴다면 그 기획 의도를 해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철학자들의 책이 다 어렵지만 그중에서 레비나스의 책이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한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해하는 데 가장 애를 먹었던 사람이 바로 레비나스였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이 사람의 철학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하곤 했다. 그 정도로 레비나스의 철학은 어렵다. "시간과 타자"를 다섯 번 정도 읽었던 이유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이 읽는다고 많이 이해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치 칠판을 지울 때 더러운 지우개를 가지고 문지르면 지우면 지울수록 칠판이 더 더러워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래서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하니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철학자들은 일부러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지 않게 그러니까 모호하게 쓰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게 맞는 것도 같다. 어차피 삶이란 것 자체가 명확히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은 강의를 속기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탄탄하지는 않다. 만약 처음부터 책으로 낼 생각으로 쓴 글이라면 아마 이 책보다는 훨씬 더 정교한 구조와 일관성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함께 섞여 있기도 하다.  그래서 질문을 가지고 읽으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 결국 이 책에서 레비나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시간과 타자에 대한 것이다. 먼저 시간에 대해서 레비나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17쪽에 보면 서술되어 있다. 17쪽은 서문에 속하는 부분이다. 뒤에 나오는 강의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서문이 오히려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으므로 이 부분을 자세히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레비나스가 시간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간과 타자"는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라는 존재론적 지평이 아니라, 존재 저편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사유'의 관계로 예감한다. 시간은, 예컨대 에로티시즘, 아버지의 존재, 이웃에 대한 책임과 같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의 사회성의 여러 형식들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관계요, 전적으로 다른 이, 초월자, 무한자와 가질 수 있는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앎, 즉 지향성으로 구조화되지 않는 관계 또는 종교이다. (17)

 

레비나스는 시간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존재 양식으로 이해한다. 이 말도 쉽지 않은데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시간이다. 즉 인간이 누리는 순간순간의 시간이 모여서 존재 전체를 이룬다. 시간이 모여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보내는 시간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라는 이해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이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가진다. 시간을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바로 관계이다. 레비나스의 글이 어려운 이유가 이런 것이다. 시간이 관계라고 주장하는데 시간 자체가 어떤 관계가 될 수는 없다. 주술 관계를 모호하게 쓴다고 해야 할까?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좀 이해하기 편하게 말하면 시간은 관계를 맺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을 통해서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타인의 얼굴을 만난다. 이러한 관계는 절대로 구조화되지 않는다. 구조화되지 않는다는 말은 신비의 영역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이 관계를 종교라고 부른다. 사실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레비니스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전체 네 개의 장, 다른 말로 하면 네 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1강에서는 고독의 문제를 다룬다. 고독의 문제에 대해서도 레비나스는 기존의 이해를 뒤집는다. 여기서 기존의 이해에 기본이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리 주어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고독에 접근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을 처음부터 거부한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학적으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매우 불분명해 보인다... 결국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타자는 서로 함께 있음의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타자와의 근원적인 관계는 함께mit라는 전치사를 통해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30-31)

 

 

우리가 알고 있는 고독에 대한 정의는 주변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인간학적으로는 그 말이 맞을 수 있겠지만 그 말의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한다. 하이데거가 전제로 삼고 있는 "서로 함께 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 서로 함께mit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고독은 타인과 함께 있다가 그 '함께'가 끊어져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함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고독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모든 인간은 혼자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내세운 단자론과 비슷한다. 모든 인간은 문도 창문도 없는 단자로서 존재한다고 레비나스는 이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고독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는 고독을 존재자가 존재를 떠맡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고독은 존재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고독이 초월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존재자와 그의 존재함 사이의 연결 원칙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자가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가는 것이다. 존재자가 존재함을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사건을 나는 홀로서기hypostase라고 부른다. (36)

 

hypostase를 홀로서기라고 번역을 했는데,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번역을 했겠지만 그냥 원래 의미인 실체라고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존재자가 존재를 떠맡는 사건은 존재자의 근원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존재자의 실체는 존재를 떠맡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은 존재자가 타인이나 다른 사물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고독은 타인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본질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존재자 없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존재자가 존재할 뿐, 존재자 없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존재자가 사라져도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든 사물, 존재, 사람들이 무無로 돌아갔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순수 무를 만나는가? 상상 가운데서 모든 사물을 파괴해 보자. 그러면 그 뒤에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은 어떤 것, 어떤 사물이 아니라 단순히 ‘있다’라는 사실뿐이다. 모든 사물의 부재는 하나의 현존으로 돌아간다. (40)

 

이런 관점에서 존재는 절대로 사라질 수 없다. 레비나스는 존재는 악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존재에게 한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계가 없다고 악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존재를 제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자에게 존재는 골칫거리이다. 

 

고독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는 고독을 "시간의 부재"라고 주장한다. (55) 시간은 타인과 맺는 관계 그 자체로 고독을 위해서는 시간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죽음에 대해 하이데거와는 다른 주장을 펼친다. 죽음은 인간에게 공포를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이데거에게는 자유의 사건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결국 죽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발판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레비나스는 죽음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레비나스도 죽음 이후에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죽음 이후에도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죽음에 대하여 중요한 것은 죽은 다음에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는 것이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절대로 모르는 죽음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죽음의 미지성은 죽음과의 관계가 빛을 통해서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주체가 신비와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고통을 통해, 모든 빛의 영역 밖에서, 자신을 예고하는 방식은 주체의 수동성의 경험이다. 주체는 이제까지 능동적이었다. (77)

 

 

죽음이란 완전한 타자성과 수동성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은 일종의 신비인데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상에 던져진 것으로 표현한다.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세상에 던져졌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단 던져진 이후에는 능동성과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 아무리 노예 상태에 있는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능동성과 주체성이 하나도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죽는다면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완전한 타자성의 영역으로 간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수동성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을 것이다. 수동성의 영역이 아니라 능동성과 수동성으로 표현할 수 없는 '없음'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죽음이 완전한 타자성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타자성의 영역과 인간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죽음이 가진 문제이다.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의 의미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네가 있으면 그(죽음)는 없고, 그가 있으면 너는 없다"는 고대 격언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죽음의 관계를 지워 버린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79) 즉 레비나스는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무엇과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죽음의 타자성을 인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죽음의 타자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무엇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더욱 팽팽하게 지탱하고 죽음에 직면해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 영역에 자신을 세울 수 있다. 타자와의 관계, 이것은 결코 하나의 가능성을 손에 거머쥔다는 사실이 될 수 없다. 타자와의 관계는, 빛을 서술하는 관계와는 뚜렷이 구별된 개념으로 특성을 그려야 한다. (85)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 사람만이 시간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현재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떨어져 있다. 현재 속에서 미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고 타자성을 지닌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다. 레비나스는 이것이 바로 시간의 실현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죽음이란 사건의 타자성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격적이어야 할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98)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융합으로 보는 관점은 바로 내가 싸우고자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 그것은 타자의 부재이다. 이것은 단순한 부재, 순수 무의 부재가 아니라 미래 지평에서의 부재, 시간으로서의 부재이다. 이러한 지평은 우리가 앞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라고 부른, 그러한 초월적 사건 가운데서 인격적 삶을 형성하는 지평이다. (111)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이 죽음과 융합할 수 없듯이  인간은 타인과 융합할 수 없다. 타인과 융합하려는 관계 형성 노력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고립된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유할 수도 없고 장악할 수도 없고 완벽히 인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만약 그런 대상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인이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반박글이면서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매우 흥미롭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고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레비나스의 시간에 대한 견해는 하이데거 철학이 가지고 있는 개인주의적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것도 한계를 명확하게 서술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사실,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인류가 수십만 년을 더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레비나스가 말한 대로 절대로 잘 모를 것 같은 것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 그 잘 모르는 것과 인간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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