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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1959)_사랑을 믿지 않는 폴

설왕은 2023. 8. 22. 11:05

사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자신을 조제라고 부르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 이름은 쿠미코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읽고 나서 조제라는 그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이 마음에 들어 자신을 조제라고 부르라고 한다. 나는 사강이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좋은 소설의 인상 깊은 문구 때문에 영화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프랑수아즈 사강은 유명한 사람이었다. 사강은 아주 젊었을 때 쓴 소설이 성공해서 유명세를 탔고 그뿐만 아니라 문제아 같은 행동을 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청소년이라면 어려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강은 그렇지 않았다. 마약 투여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에도 사강은 당당하게 자신의 일탈과 범죄를 밝혔다. 자신에게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멋있다고 느낀 사람도 꽤 있었던 듯.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강의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나는 사강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주인공 조제에게 끼친 사강의 영향력을 알고 싶었다. 사강의 삶은 멋있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조제는 멋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사강의 어떤 생각이 쿠미코를 조제로 만들었을까? 그래서 고른 소설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였다. 동명의 드라마를 한 적이 있어서 일단 이름이 익숙했고 사랑 이야기여서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폴이라는 여자의 연애 이야기다. 서른아홉 살의 이혼녀 폴은 로제와 6년간 교제 중이었다. 로제는 그냥 평범한 아저씨 느낌의 남자였던 것 같다. 여자 친구에게 헌신적인 남자는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다른 젊은 여자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서 폴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어찌 보면 재수 없는 남자였다. 폴에게 나타난 시몽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남자. 시몽은 스물다섯 살이었다. 폴이 시몽에게 갔다가 다시 로제에게 돌아가는 이야기. 어떻게 보면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고 또 다르게 보면 독특한 이야기다. 왜 폴은 로제에게 돌아갔을까? 

 

 

😊 줄거리 + 인용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김남주 옮김, 민음사-세계문학전집 179, 2008)

 

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경우 흔히 갖게 마련인 신랄함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조심성에 가까운 차분함을 가지고, 좌절로 얼룩진 거울 속의 얼굴을 서른아홉 해로 나누어 보았다. 얼굴의 음영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주름을 더 깊어 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손가락 두 개로 잡아당기는 그 탄력 없는 살갗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 아가씨의 대열에서 아줌마의 대열로 마지못해 넘어가고 있는, 외모에 몹시 신경을 쓰는 또 다른 폴의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로서는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9)

 

폴은 로제와 교제한 지 6년이 되었다. 오래된 연인으로 서로를 잘 알고 있었지만 약간은 느슨해진 관계였다. 하지만 폴은 로제에게 늘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로제는 폴의 기분의 변화에 민감했다. 그러나 로제는 폴을 편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로제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뿐, 폴이 원하는 바를 애써서 들어주려 하지는 않았다. 폴이 로제가 좀 더 자신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날에도 로제는 걷고 싶고 도시를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녀 곁을 떠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른아홉 살이었던 로제는 자신보다 열네 살 어린 시몽을 보았다. 폴이 반 덴 부시 부인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기 위해 부인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녀의 아들인 시몽을 보게 된 것이었다. 헐렁한 실내복에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었던 시몽은 깜짝 놀랄 정도의 미남이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고 누구나 눈길을 줄 것 같은 시몽에 대하여 폴은 관심을 두기 어려웠다. 폴은 시몽이 자신의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성적인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시몽은 폴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일부러 폴을 데려다 주기 위해 한 시간을 기다렸고 결국 그녀를 직장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차에 타느라 그녀는 스타킹까지 찢어졌다. 그녀는 이 불편한 자동차 안에서, 그녀에게 매혹당한 것이 분명한 이 낯선 청년과 함께 있는 그녀 자신과, 자동차 덮개를 통해 들어와 그녀의 연한 색 외투를 더럽히는 빗방울이 아주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세금을 내고, 어머니에게 하숙비를 보내고, 상점의 빚을 결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그녀는 자세한 계산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시몽이라는 청년 역시 자동차를 빨리 몰았다. 그녀는 로제를, 그리고 그녀 자신이 보낸 지난밤을 생각하고 다시 침울해졌다. (24)

 

 

시몽은 폴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찾아다니다 로제와 함께 있는 폴을 발견했다. 그리고 폴을 찾아다녔다고 고백하면서 폴을 만났던 것이 꿈이 아니었나 자문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팔에 손을 얹었다. 시몽은 폴에게 결혼했냐고 질문하자 로제는 불쾌해했다. 시몽은 로제 앞에 있는 폴에게 로제를 사랑하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폴이 시몽에게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자, 시몽은 곧바로 사과했다. 시몽은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었고 로제와 폴은 시몽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다음날 시몽은 사과하기 위해 폴을 찾아왔고 두 사람은 숲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시몽이 다른 사람을 흉내 내자 폴은 그 모습에 흥미를 느껴 웃었고 그에게 마음을 조금 열게 되었다. 폴이 시몽과 함께 밖에 나가 걸을 때 폴은 시몽에게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특별한 애정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폴은 자신과 함께 하는 동반자에게는 언제나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남편 마르크에게도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던 또 다른 남자에게도 그리고 로제에게도 그녀는 애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폴은 시몽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폴은 시몽과 거리를 유지하며 로제와의 사랑과 의리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로제는 메지라는 여자와 바람이 났다. 메지는 무척 예뻤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사소하고 시시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로제는 그녀를 측은하게 여길 정도였다. 메지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일정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졸랐고 로제는 메지의 제안에 화답했다. 로제는 폴에게 현지 동업자와 일을 하기 위해 주말에 폴과 함께 보낼 수 없다고 알렸고 폴은 로제의 말을 믿었다. 폴은 이틀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또 주말에 혼자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폴은 토요일에 반 덴 베시 부인의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약속을 잡고 방문했다. 자연스럽게 시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시몽의 어렸을 때의 사진을 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시몽이 들어왔다. 시몽이 폴을 문까지 바래다주는 과정 속에서도 시몽은 폴이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폴은 여전히 시몽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폴에게 속달우편이 도착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과 함께 오후 6시에 공연에 같이 가자는 시몽의 제안이었다. 폴은 연주회에 갈지 말지 결정하지 않은 채 시몽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몽은 부재중이었고 폴은 연주회에 가기로 결심했다. 6시 연주회에서 폴은 시몽과 만났다. 시몽은 낮에 교외에 나갔다가 로제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었지만 폴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연주회가 끝나고 두 사람은 칵테일을 마시러 갔다. 폴은 시몽을 보면서 그는 정말 잘생겼지만 자신은 그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이 기묘한 일이라고 느꼈다. 다시 한번 시몽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하지만 폴은 자신이 로제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를 거절했다.   

 

로제는 메지를 집에 데려다주고 폴을 만나러 갔다. 폴은 로제를 보자마다 그에게 안겼다.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일과를 묻다가 로제는 폴이 시몽과 함께 브람스 연주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제는 폴에게 화를 냈다. 로제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폴을 상상하자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로제는 폴에게 자신이 완전히 폴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폴은 생각했다. 

 

'남자들은 뻔뻔스러운 데가 있어." 폴은 별다른 유감없이 생각했다. '날 완전히 믿는다니. 완전히 믿는 나머지 날 속이고 혼자 내버려 두다니. 하지만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 참 대단해." (71-72)

 

 

폴 역할을 했던 잉그리드 버그만

 

폴은 로제와 대화하면서 그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폴에게 계속 거절당한 시몽은 소송 사건을 위해서 시골로 떠나면서 폴에게 편지를 남겼다. 시몽은 폴을 당혹스럽게 한 것에 대해서 사과를 하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계속 사랑할 거라고 고백했다. 폴은 시몽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빨리 돌아와요"라고 답장을 썼다. 시몽은 그 편지를 보고 급하게 폴에게 달려왔지만 폴은 전혀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몽은 그런 폴을 보면서 불행했고 그녀가 자신을 받아주었다고 확신했던 것이 유감스러웠다. 하지만 시몽이 폴을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같이 차를 타고 갈 때 시몽은 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두었고 폴은 시몽의 손에 키스를 했다. 그들 사이에 처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몽의 어머니 반 덴 베시 부인도 시몽과 폴 사이의 관계를 눈치챘다. 거실의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자 부인은 디너파티를 열었고 거기에 폴과 로제를 초대했다. 로제는 메지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지만 자신에 대한 폴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고 자신도 폴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파티에서 로제와 시몽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로제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며 폴과 함께 파티를 빠져나왔다. 로제는 폴을 집에 데려다주고 늘 그랬던 것처럼 폴의 곁을 떠났다. 그런데 폴의 집 앞에는 시몽의 차가 서 있었다. 시몽은 집에 들어가려던 폴을 불러서 자기 차에 잠깐 타라고 말했다. 

 

그가 가까이에, 너무 가까이에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로제가 그를 보았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몽에게 키스했다. 
겨울바람이 거리로부터 자동차 안으로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시몽은 그녀의 얼굴을 키스로 뒤덮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젊은 사내의 그 체취, 그 헐떡임, 그리고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한마디 말없이 차를 떴다. (92-93)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 시몽은 폴에게서 자신을 만나려고 애쓰지 말라는 전갈을 받았다. 시몽에 대한 자신의 집착이 너무 강해서 그것이 시몽을 힘들게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시몽은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열흘 정도 지난 어느 날 오후 6시에 폴이 일하는 점포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폴을 만나자 시몽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시몽은 평화를 느꼈고 폴도 안도감이 들었다. 폴이 시몽과 만나지 않은 열흘 동안에도 폴은 로제를 되찾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사였다. 그러자 폴은 자신을 만나면 "저는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시몽에게 설복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시몽은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폴은 시몽과의 관계로 인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던질 시선과 말이 두렵기도 했다. 시몽과 폴이 처음으로 같이 밤을 보낸 다음 날부터 시몽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시몽은 폴에게 너무 행복해서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가 말한 대로 행동했다. 차를 타고 파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보였으며 폴의 상점 앞을 수도 없이 지나갔다. 그는 행복한 몽유병자 같았고 폴은 시몽의 그런 모습을 소중하게 여겼다.  

 

로제는 메지에게 싫증이 났고 폴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로제는 폴과 약속을 하고 점심에 만났다. 폴은 로제에게 자신은 시몽과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고 로제는 자신은 말할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폴은 로제가 불행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제는 폴과 대화를 나누면서 긴장감을 풀 수 있었고 자신이 진짜 폴의 애인이라는 자신감을 가졌다. 폴은 로제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증스러웠다. 

 

"어쨌든, 그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무관심하게 방치해 두지 않는 건 분명해."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내가 의도적으로 저 사람의 아픈 곳을 찌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하고 그녀는 얼떨결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114)

 

로제는 폴에게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폴은 로제에게 한동안 만나지 말자고 했다. 폴은 집에 돌아왔고 시몽은 그녀를 달래주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시몽은 위스키를 많이 마신 상태였고 외출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시몽은 존재의 어려움에 대해서 길게 말을 늘어놓다가 잠이 들었다. 폴은 그런 시몽이 불쌍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로제는 메지가 하는 말이 거슬렸고 그녀가 너무 천박하다고 느꼈다. 메지는 로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로제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말라고 타박했다. 로제는 메지와 함께 머물던 민박집에서 도둑처럼 빠져나왔다. 로제는 자기와 폴 사이의 관계가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시몽은 일을 하러 가지 않았고 계속 폴의 집에 머물면서 술을 마시며 지냈다. 폴은 그런 시몽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분노가 일었다. 폴은 시몽에게 술을 그만 마시고 나가서 일을 하라고 수없이 말했다고 지적하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경고했다. 시몽은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시몽은 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결국 자신을 쫓아내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위스키를 계속 마셨다고 했다. 폴은 시몽을 위로해 주었고 시몽에게 바라는 것은 그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몽은 다음 날 일을 하러 나갔다. 

 

로제와 폴은 해마다 2월이 되면 일주일 동안 함께 산에서 보내곤 했다. 로제는 폴에게 전화를 걸어서 열흘 후에 자신이 산으로 떠날 것이라고 알렸고 폴의 티켓도 준비해야 하는지 물었다. 본능적으로 로제는 폴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폴은 로제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기도 했지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로제의 목소리를 들은 폴은 그에게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날 저녁 폴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시몽은 양복을 차려입고 같이 외출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폴이 입을 노출이 심한 이브닝드레스를 골라 놓았다. 칵테일 두 잔을 마시고 옷을 갈아입은 폴은 행복하다고 느꼈다. 두 사람은 함께 외출했고 나이트클럽에서 폴이 사업 관계로 만나는 여자 둘을 만났다. 폴은 그 여자들이 폴의 나이가 몇이냐고 서로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시몽에게 몸을 기댔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 말았다. 드레스는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고, 시몽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었으며, 그녀의 삶은 지나치게 비상식적이었다. 그녀는 시몽에게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131)

 

시몽은 폴이 그 여자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기를 바랐으며 로제에게 벗어나 그들 사이의 사랑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했다. 부활절 휴가가 다가오자 시몽은 이탈리아나 에스파냐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폴은 평온한 휴가를 보내고 싶었지만 시몽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시몽은 날마다 폴에게 빠져서 늘 그녀의 곁을 지키며 같은 행동과 생각을 반복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다고 느꼈다. 하지만 시몽은 폴 안에 일종의 뿌리처럼 로제가 있다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계속 걸렸다. 폴은 혼자 있을 때면 로제가 그녀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폴은 시몽과 함께 살고 있었다. 폴은 시몽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십 년 후에도 시몽이 자신을 사랑할까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때쯤이면 자신은 혼자 있거나 로제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폴은 자신이 반드시 시몽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폴은 왜 자신이 로제에게 그토록 집착하고 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로제는 그녀에게서 늘 빠져나가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싸움이 폴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느끼기도 했다. 

 

시몽과 폴은 어느 날 저녁 식당 앞 문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폴은 여전히 로제를 사랑하고 있었다. 로제도 함께 온 여자가 있었다. 로제와 폴은 멀리서 목례를 통해 인사했다. 시몽은 폴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활기가 없었다. 시몽은 폴과 로제 사이에 어떤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 후 춤을 추다가 로제는 자신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여자의 등에서 손을 떼어 폴에게 그 손을 뻗었고 그녀의 팔에 로제의 손이 닿았다. 그때 로제의 표정은 너무나도 간절했고 폴은 그 표정을 보고 눈을 감아 버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Goodbye Again, 1961)

 

다음날 폴의 사무실에 로제의 속달우편이 도착해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 없으며 폴을 만나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했지만 편지를 받고 난지 10분 만에 로제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 불행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화해했고 서로의 잘못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폴은 로제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익숙함으로 인해 구원받은 듯했고 동시에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 같기도 했다. 

 

열흘 뒤 시몽은 폴의 집에서 나가기 위해서 짐을 쌌고, 폴은 시몽을 도와주었다. 폴과 시몽은 서로에게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폴은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에게 돌아선 시몽을 품에 안아 주었다. 시몽은 몸을 빼더니 짐을 놓아둔 채로 나갔다. 폴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150)

 

 

😊 줄거리를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사강의 글은 읽을 만한 작품이다.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좋은 작품인지 그렇지 않은 작품인지 나눌 수 있을 텐데,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은 '소설 같은 소설'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다. 일단 서른아홉 살의 여자와 스물다섯 살의 남자가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스물다섯 살의 남자가 서른아홉 살의 여자를 특별히 좋아하게 된 계기도 없다. 시몽이 폴에게 빠진 것은 아마도 첫인상에 넘어간 것 같은데 첫인상으로 본다면 시몽이 훨씬 매력적인 사람이다. 시몽은 지나치게 잘 생겨서 사람들의 시선을 훔칠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생기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시몽은 폴에게 계속 구애한다. 게다가 폴은 남자친구도 있다. 그것도 정말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다. 그걸 알면서도 시몽은 계속 도전한다. 결국 폴은 시몽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채워주는 시몽을 마음 깊이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것 역시 희한한 일이다. 폴이 로제에게 섭섭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녀 곁을 지켜주지 않고 늘 적당한 선에서 떠난다는 것이었다. 시몽은 폴 곁에 스물네 시간 머물고 싶어 하는데 폴은 그것을 또 원하지 않는다. 결국 폴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났던 로제에게 돌아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대강의 줄거리만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세한 줄거리와 결정적인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뭐, 어차피 소설이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제목부터 특이하다

책 제목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아니라... 말줄임표로 마침표 세 개가 있는 형태다. 별생각 없이 책을 읽었을 때는 당연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물음표가 빠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표지에 나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말줄임표라니...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저자의 의도였다니. 보통 출판사에서 작가가 이런 식의 제목을 요구하면 거절할 것 같은데 사강의 고집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일까? 의문문이 아니라 평서문이고 말줄임표가 붙어서 그 느낌을 살려서 말을 해보았다. 의문문이라면 말끝에 힘을 주면서 강조할 텐데, 말줄임표가 붙어 있는 평서문이라면 뒤로 갈수록 말에 힘이 빠지면서 이게 과연 의문문인지 평서문인지 모르게 끝이 나게 마련이다. 책 뒷부분에 있는 해설을 보니 프랑스 사람들은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브람스 연주회에 간다면 꼭 상대방에 물어보는 게 필수적이라고 한다. 보통은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당신은 확실히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당신과 함께 연주회에 가고 싶으니까 물어보기는 하는데 만약에 당신이 같이 간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브람스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건 저자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는데... 여하튼 내 생각은 그렇다. 이것이 바로 폴에게 접근하는 시몽의 자세다.  

 

 

😊 사랑을 믿지 않는 사강

사랑을 믿냐는 질문에 사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사강을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폴도 사랑을 믿지 않는 것 같다. 폴이 원했던 것은 자기 나이에 맞는 편안함이었던 듯싶다. 너무 잘생긴 시몽이 자기 옆에 있는 것이 불편했던 것 같다. 사람들의 시선이 시몽에게 꽂히면서 덩달아 그 옆에 있는 자신에게도 향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시몽이 원하는 이브닝드레스를 입기는 했지만 아주 많이 불편함을 느꼈고 시몽이 계획하는 여행도 폴에게는 맞지 않았다. 폴의 나이가 서른아홉이었는데(지금 서른아홉이면 완전 젊은이인데 그 당시에는 많이 나이 든 축에 속했을 것이다) 폴은 여행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니 그런 것도 맞지 않았다. 사랑을 믿는다면 사랑을 위해서 노력하거나 또는 노력이라고 느끼지 않을 정도로 상대에게 빠져서 초능력을 발휘했을 텐데, 폴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은 원래 없는 거니까. 바람이 났던 로제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 폴에게는 로제 정도의 상대가 딱 편안하게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폴은 자신이 로제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물론 시몽이 폴에게 대하는 자세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폴에 대한 시몽의 마음과 로제에 대한 폴의 마음 중 사랑에 더 가까운 것은 어느 쪽이었을까? 나는 시몽인 것 같다. 폴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거나 사랑을 했다가도 감정의 변화로 인해 사랑의 열정이 사그라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듯싶다. 마치 열정만을 믿는 사강처럼 말이다. 그래도 사강은 열정만을 쫓으며 살았던 것 같고, 폴은 열정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했던 것 같다. 나는 폴이 시몽을 거부했던 것도 다시 로제를 만나기로 결정한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 중간 정도에 길이 있을 것 같다. 

 

 

😊 사랑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사강의 말을 생각해 보니 사랑에도 믿음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랑의 불을 지피는 감정은 열정적인 에너지를 내뿜기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리기도 한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시 사랑의 불을 지필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또 다른 불을 찾아 떠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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