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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클레멘타인과 유물론 사이, 웃음과 눈물 사이

설왕은 2025. 1. 28. 09:00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다름 아닌 '클레멘타인' 이야기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흥얼거리던 그 노래가,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었을 줄이야! (233) 골드러시 시대, 캘리포니아 협곡에 정착한 아버지와 딸. 아내는 아마 없었던 듯합니다. 낯선 땅에서 오직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던 부녀. 그러던 어느 날, 클레멘타인이 강물에 휩쓸려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이죠.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났지만, 그곳에서 소중한 딸을 잃은 아비의 절절한 슬픔이 담긴 노래, 바로 클레멘타인입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애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렴풋이 슬픈 노래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사무치는 아픔이 깃든 곡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클레멘타인이 그저 철없이 어디론가 놀러 가서 늦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영 어디 갔느냐'는 가사를 곱씹어보면, 잠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그토록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왜 가사에 담긴 사연에는 그토록 무심했을까요? 클레멘타인의 슬픈 이야기도 마음 아팠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 노래에 담긴 아픔에 그토록 무관심했던 제 자신이었습니다.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 노래를 만들고 불렀던 사람들의 고통을 단 한 번도 헤아려보지 못했던 것이죠. 만약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면, 저는 신이 나서 "제가 당신 노래 알아요!"라며 클레멘타인을 불렀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바로 이런 느낌을 주었습니다. 괴팍한 유물론자, 신념으로 똘똘 뭉친 빨치산, 그리고 그 신념 때문에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했던 아버지 고상욱 씨.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에, 아버지의 죽음이 특별한 사건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게 되니까요. 하지만 소설 속 아버지는 조금 특별합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7)

 

 

황당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웃기다고 해야 할까요? 죽음 앞에서 함부로 웃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피식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떻게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을 수 있을까요? 마치 아무 생각 없이 클레멘타인을 부르듯, 소설 속 아버지의 죽음을 그저 웃긴 사건으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정신없이 살았으면, 혹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았으면 전봇대를 들이받고 죽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저에게 던진 메시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 이 웃기는 양반 이야기 좀 들어보니 어때?" 제 대답은 "클레멘타인"입니다. 웃기지 않습니다. 웃긴 이야기가 많아서 웃으면서 읽었지만, 결국 웃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 아버지는 결코 웃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진지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딸 아리는 힘들었고,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소설의 두 번째 문단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 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니 우리 집안에 유머가 있었다기보다 혁명을 목전에 둔 듯 진지한 그들의 어떤 행위나 삶의 방식이 유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웃기긴 했다. (7-8)

 

 

이 책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다는 것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일일까요. 특히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다는 것은 국가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 세력으로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숙청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독재 시대에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까요? 지금도 '빨갱이', '공산주의'라는 단어에 자동적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전쟁 직후 20세기 중반에 사회주의 신봉자로 살아가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소설 속 아버지뿐 아니라, 당시 깨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은 달콤한 유혹이었을 겁니다. 모두가 차별 없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에 누가 감히 반기를 들 수 있을까요?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그 완벽해 보이는 이상을 향해 달려가고 싶을 겁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바로 그랬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헌신했던 시간은 고작 4년 남짓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은 아버지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아 인생이 꼬여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딸은 어떨까요? 원치 않게 사회주의자의 딸로 태어나, 반동분자와 같은 낙인이 찍혀 고생해야 했던 딸에게, 아버지와 아버지가 택한 신념은 그저 인생의 걸림돌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딸은 미운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한 채 살아가다가, 전봇대에 부딪쳐 죽은 아버지 앞에서 그의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그래서 소설이 끝난 뒤 작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나이 들수록 잘 산 것 같지가 않다. (266)

 

 

소설은 뚜렷한 줄거리 없이 여러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형식입니다. 그 에피소드들을 통해 사회주의 유물론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사회주의자였다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에 편승하여 성공을 좇는 사람이라면, 지금껏 사회주의자로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정말 만나보기 힘든 사회주의자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유물론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유물론에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뿜는 뜨거운 열정 같은 것이, 저는 참 좋습니다.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어"라고 말하며 초연한 척 살아가는 사람들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에 발붙이지 않고 우아하게 살아가려고만 합니다. 때로는 그런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저를 끌어당기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구질구질하고 꼬깃꼬깃하게 살아가는 유물론자들이 더 매력적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래,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하지만 유물론이 늘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뼛속까지 유물론자였다. 부모가 여든 넘도록 장지 마련은 고사하고 영정사진 찍어둘 생각조차 못한 불효자식이었으나 아버지의 유지가 그러하였으니 따르면 될 터였다. 역시 유물론은 산뜻해서 좋다. (94)

 

 

맞습니다. 유물론은 어찌 보면 참으로 명쾌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니, 제사가 무슨 소용이며, 굳이 명당을 찾아 묫자리를 쓸 필요도 없지요. 그저 한 줌의 재로 돌아가 자연으로 흩어지면 그만인 것을요. 아등바등 살아가는 삶이지만, 죽음과 함께 모든 고통과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점은 유물론의 또 다른 매력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만약 고상욱 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면, 그의 영정사진 앞에서 어떤 말을 건넸을까요?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이고, 불쌍한 양반.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다니, 어찌 이리 허망하게 가십니까?"

그렇다면 뼛속까지 유물론자였던 고상욱 씨는 제 말에 어떤 대답을 했을까요? 아마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까요.

"불쌍하긴 뭐가 불쌍혀. 먼지에서 왔으니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디. 삶이라는 것이 아프고 슬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살아봤으니 그런 것도 느껴본 것 아니겠어? 나는 살아서 좋았당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대한 저의 마지막 한 줄 평은 이렇습니다.

아, 유물론이여. 아, 클레멘타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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