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니체"라...
"마흔에 읽는 니체"라는 제목이 참 와닿았습니다. 니체는 10대나 20대에 읽기에는 좀 어려운 철학자인 것 같아요. 저도 그랬지만, 섣불리 니체의 "신은 죽었다" 같은 말을 접하고는 겉멋만 잔뜩 들어서 허세만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니체의 철학은 그렇게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기에는 너무 아깝죠. 인생의 쓴맛을 어느 정도 보고, '나도 이제 젊지 않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니체를 만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흔에 읽는 니체"라는 접근 방식은 정말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철학은 워낙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이 책은 비교적 쉽게 설명해줍니다. 만약 저자가 니체 철학을 전공한 박사였다면 이렇게 쉽게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두루두루 읽는 사람인 것 같고,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이 아주 평이하고 술술 읽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책의 구성: 네 가지 질문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마흔, 무엇을 살아야 하는가: 니체의 인생 설명서
- 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하는가: 니체의 운명 관리론
- 어떻게 인생을 여행할 것인가: 니체의 자극제
-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 니체의 마지막 질문
🎈1장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위험하게 살아라!
1장은 "마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이지만, 사실 '무엇'에 대한 내용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룹니다. 1장의 첫 번째 주제는 "위험하게 살아라"인데, 뒤에 나오는 주제들도 이와 거의 비슷합니다. 극복하고, 바라고, 오두막에 불을 지르면서 다시 시도하라고 말합니다. 익숙했던 것과 헤어지고 내가 원하는 나로 살라고 주장합니다. 불혹의 나이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는 나이를 불문하고 인간 삶의 방식에 대한 니체의 주장입니다. 40대이건 70대이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서판을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 먼저 ‘창조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나로 산다는 것은 창조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창조자가 될 수 있을까? 기존의 가치 목록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낯선 세계로 나아갈 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23)
저자의 설명을 듣는 것도 좋지만,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니체의 말에 더욱 큰 울림이 있습니다. "위험하게 살아라! 도시를 화산 위에 세우고, 미지의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위험한 삶을 선택하라."
🎈2장 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하는가: 자기 긍정
2장에서는 "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성스러운' 긍정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렇지 않은 긍정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자는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지만, 저는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니체는 정신의 발전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거룩하지 않은 긍정' 단계는 낙타입니다. 낙타는 짐을 거부하지 않고 뜨거운 사막을 횡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내심의 상징이자 마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긍정의 화신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성스럽지 않은 긍정입니다. 낙타에서 사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자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달려 나가 포효하고 움켜쥐고 물어뜯는 것이 사자입니다. 그보다 더 윗 단계가 어린아이입니다. 아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납니다.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니체는 반문한다. 그리고 자답한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아이가 되어야만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놀이에 집중하는 순진한 아이의 모습에서 진정한 창조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는 무엇인가 마음에 안 든다고 울며 떼쓰다가도 곧 잊어버리고 다시 즐겁게 놀이에 뛰어든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은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하다. (91)
🎈3장 어떻게 인생을 여행할 것인가: 예술로 삶을 긍정하라
3장의 질문은 "어떻게 인생을 여행할 것인가"입니다. 답은 '예술로'입니다. 니체는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구분하고 비교하며 예술을 위해서 디오니소스적인 의식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극의 탄생은 디오니소스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 이후로 디오니소스는 억압받아 왔습니다. 디오니소스가 무시당하고 소외받으면서 비극 역시도 예술의 영역에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니체는 이것이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비극과 고통 역시 인생의 주요한 구성 요소이고, 이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예술 능력은 한층 더 함양된다고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통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삶을 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리스 비극 같은 비극 작품을 통해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서 영혼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한 작용은 대부분 추한 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조형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과 시에서도 오직 정돈되고 도덕적인 균형 속에서 표현하도록 요구한다면 예술의 한계를 너무나 편협하게 정한 것이다. (206)
🎈4장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 고통을 긍정하라
4장,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입니다. 삶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고통입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인생은 살기 버거운 것이 됩니다. 고통에 대한 니체의 처방은 간단합니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말합니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오히려 거대한 고통이야말로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이며 이러한 고통이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심오하게 만든다." 후자는 말이 되고 이해되기도 합니다. 고통을 통해 성장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까요? 병든 사람이 약을 달라고 했는데, 더 큰 병을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바다로 항해를 떠났는데 큰 파도가 다가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는 피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맞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파도는 바다의 한 요소입니다. 큰 파도가 치는 바다도 바다고, 큰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도 바다입니다. 그러니 큰 파도가 친다고 그 파도를 계속 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삶도 삶이고, 고통스럽지 않은 삶도 삶입니다. 고통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면,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말은 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삶을 사랑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원한'입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원한을 가지기 쉽습니다. 약자가 불행한 이유는 강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에 반대합니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주인 도덕은 무엇이 좋고 나쁜지 스스로 결정하는 반면, 노예 도덕은 그런 가치 판단 없이 상대방은 악하고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유형인 노예 도덕은 지배받는 자, 즉 노예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예를 들면 학대받는 자, 억압받는 자, 고통받는 자,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자, 피로에 지친 자들의 도덕이 바로 노예 도덕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는 주인 도덕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고 증오한다. 이 감정이 바로 르상티망이다. 원한에 찬 노예는 자신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강자였던 지배자에게 반감을 가진다.(232)
🎈니체, 삶의 파도를 사랑한 철학자
니체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의 말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화산 위에 도시를 세우라는 말을 듣고 바로 이해가 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저 니체를 정신 나간 사람 정도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니체를 따라가고 싶은 이유는, 그는 인생의 끔찍함을 스스로 경험했으면서도 동시에 인생을 긍정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에게 다시 한번 삶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래서 신이 니체에게 "이번에는 고통 없는 삶을 줄까?"라고 물어본다면, 제 생각에 니체는 단박에 "아니요. 그냥 그대로 삶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 고통을 안고 다시 한번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거대한 파도에 몸을 부딪히며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물을 마신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감내하며 웃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니체에게 끌립니다. "마흔에 읽는 니체"는 마흔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가볍게 읽으며 니체 철학의 맛을 느껴볼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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