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20분설교]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설왕은 2019. 6. 30. 21:06

(시 1, 개정)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안녕하세요.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도 잘 지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사사기 인물 시리즈로 설교를 지난주에 시작하셨는데요. 지난주일에 옷니엘 설교 잘 들으셨죠?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저도 오늘은 구약을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제가 5월 마지막 주일과 6월 첫째 주일에 용서에 관한 설교를 했습니다. 용서 설교를 하면서 제가 몇 가지 생각을 했는데요. 첫째, 일단 용서를 두 번 나눠서 설교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서가 중요하면서 복잡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한 번에 다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다 안 하고 두 번에 나눠서 한 것은 잘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용서 설교를 한 번이 아닌 두 번으로 나누어서 한 것은 잘했는데, 더 나누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두 번에 하는 것도 무리였습니다. 두 번째 설교가 너무 복잡해졌고, 주제를 파악하기 힘들게 좀 엉켜버렸습니다. 반성했습니다. 적어도 다섯 번 정도로 나누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용서를 설교하면서 저도 제 마음을 다시 한번 점검했습니다. 제 마음을 들여다보니 저도 용서를 싫어하더라고요. 용서에 관해서 설교한다니까 아내가 “그냥, 용서 안 하면 안 돼?”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말이 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용서를 잘하고 그러니까 용서를 잘 실천하고 용서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제 마음에 즐거움을 주었다면 정말 다섯 번 정도로 나누어서 용서 설교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두 번 만에 저도 지치더라고요. 용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용서와 관련해서 저의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설교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 드류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드류대학교가 되게 생소하시겠지만 사실 한국 기독교인이라면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학교입니다. 드류대학교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공부하고 졸업한 학교인데요.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파송받은 안수받은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드류대학교는 한국과 인연이 많은 학교입니다. 지금도 그 인연으로 인해서 많은 한국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2015년도에 드류대학교에서 한인학생회 회장으로 섬겼습니다. 한인학생회 회장으로 섬기면 해야 할 일이 여러 가지 있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개강예배, 종강예배를 기획하고 진행해야 하는 일이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예배 기획에 제일 중요한 부분은 아무래도 설교자 섭외입니다. 그래서 제가 근처에 유명하신 목사님들 설교를 들어보고 어떤 목사님을 모셔야 할지 결정을 해야 했거든요. 보통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 목사님 중에 설교를 잘하시는 분들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제가 목사님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도 아니어서요. 그냥 홈페이지에서 목사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연락을 드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꼭 모시고 싶은 분이 한 분 있었어요. 제가 지금 그분 성함을 말씀드리면 여러분도 다 아시는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담임하시는 교회가 드류대학교에서 꽤 떨어져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차로 한두 시간 걸리는 정도는 가까운 건데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대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래도, 사실 애정이 있으면 못 올 거리는 아니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러쿵저러쿵해서 이러저러해서 여차 저차 해서 꼭 모시고 싶다고 길게 이메일을 썼는데요. 며칠 있다가 답장을 받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열어 보았죠. 그런데, 저는 이만큼 써서 보냈는데 답장은 딱 두 문장이 왔습니다. 거절의 이메일이었고요. 그때 제 마음에 든 생각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복수해야지.’ 제가 생각하는 복수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단 유명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한 번 모셔서 설교를 들어보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면 그 목사님께서 저한테 연락하실 수도 있잖아요.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받으면 제가 그러는 겁니다. 제가 이 부분에 있어서 좀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딱 네 글자로 말할 거예요. 아주 짧게. “못 갑니다.” 혹은 “안 갑니다.” 이 둘 중에 하나로 복수하려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못 갑니다”가 낫겠죠? 그런데 아마 복수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복수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 얘기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말은 복수하라는 말이죠? 누군가 내 눈을 쳤으면 나도 그 사람의 눈을 쳐도 좋다는 것이고 누군가 내 이를 하나 부러뜨렸으면 나도 그 사람 이를 하나 부러뜨려도 된다는 말이죠?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좀 폭력적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라는 말이 아니라 이 말은 오히려 지나친 복수를 금지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의 한쪽 눈을 찔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눈을 찌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고 싶겠습니까? 두 눈을 다 찌르고 싶을 겁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때려서 이 하나가 부러지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싶겠습니까? 이 하나로 만족이 되시겠습니까? 죄를 지었으면 그에 따른 정당한 벌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상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기 어렵습니다. 더 심한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그래서 지나친 복수를 금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복수하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저는 두 문장이 아니라 단 네 글자로 거절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더 큰 상처를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공식에 따르면 저는 두 문장 정도는 쓰면서 거절을 하는 게 맞습니다. 

 

성경은 이미 구약에서 지나친 복수를 금지하고 있고요. 예수님은 그마저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온 내용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렇다면 제가 복수를 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옳지 않죠. 오늘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복수하고자 하는 생각은 악인의 꾀입니다. 악인의 꾀는 긴 시간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생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도 악인의 꾀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악인의 꾀, 나쁜 생각은 되게 흔한 것입니다. 때로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정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요. 이 생각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은 사람이 어떻게 악해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나쁜 생각들을 좀 하고 흘려보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악인의 꾀를 따릅니다. ‘그래 그 생각이 옳아. 나는 그 생각대로 할 거야.’ 이러고 나면 이제 죄인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악인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에 서는 것이죠. ‘사람들이 다 이 길로 가는데 나도 이 길로 갈 거야.’라고 결심하고 넓은 길에 섭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것이죠. 그 길을 가다 보면 좋아 보이는 곳이 있을 겁니다. ‘아, 저 자리에 가면 내가 돈 좀 벌 수 있겠구나. 아 저 자리에 가면 내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 좀 받겠구나. 아 저 자리에 가면 사람들이 내 말에 굽신굽신 하겠구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전에 유시민 선생님이 했던 말인데 제가 뇌리에 깊게 새겨진 말이 있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유시민 선생님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라고 반대로 주장하시더라고요. “저 사람이 원래는 참 겸손하고 선한 사람인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더니 사람이 변했어.” 이런 얘기 들어보셨죠? 보통은 세상에서 말하는 높은 자리는 오만한 자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는 말은 원래는 안 그랬던 사람이 그 자리에 가서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러고 싶은 사람이 그런 자리가 나면 얼른 그곳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오만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예 그 자리를 거절한다는 말입니다.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자동으로 원래 선천적으로 복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노력으로 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악인의 꾀를 쫒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은 굉장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차이점을 살펴보죠. 복 있는 사람은 무엇에 비유되고 있습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다고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악인은 어떻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악인은 바람이 불면 마구 날아다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진중한 사람입니다.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악인은 가벼운 사람입니다. 유행에 민감합니다. 그 유행에 따라 마구 이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바람에 날아다니는 악인들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바람에 날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악인들이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얼른 바람을 타고 날아가 오만한 자의 자리를 선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관심이 많습니다. 특별히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어디 땅값이 오를까 어디 집값이 오를까 어떤 주식이 오를까 어떤 번호를 써야 로또에 당첨될까 관심을 가집니다. 미리 선점하지 않으면 돈을 벌기 어렵거든요. 저도 회사 다닐 때 사람들의 고민이 그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세상이 변할 것인가? 트렌드를 예측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런 바람의 방향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혹은 “세상이 왜 이래?”라고 말하지 않고 “세상은 이렇게 돼야 해”라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해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저는 3절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만사가 형통하리라는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제 적은 경험으로도 그렇고요. 예수님의 삶 자체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삶이었는데요. 그의 삶이 만사형통한 삶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격려하기 위해 약간 과장해서 쓴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요, 그 앞부분에 말씀은 저는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때가 되면 과실을 맺습니다. 우리가 의도적인 행동을 지속적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당장에 일이 잘 된다거나 성공한다거나 그러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그에 따른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애에 일어날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정말 먼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전에 그런 기사를 본 적 있습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에 대한 기사였는데요. 잡스가 80년대에 미래를 예측한 것이 대부분 이루어졌다는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의 요점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라는 앨런 케이(Allen Kay)의 말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미래를 예측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예측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점쟁이에게 가지 마시고요. 예언기도받으러 가지 마십시오. 미래는 우리가 만듭시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 되어갈지 예측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바람을 예측하지 말고 우리가 바람을 일으켜 봅시다.

 

한 가지만 적용을 해 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할까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예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줄기차게 제시하고 있는 바람직한 이상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시한 것이 아니고요. 구약성서, 가장 오래된 성경부터 시작해서 계속 지향하는 세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아와 객과 과부가 존중받고 대우받는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시받기 쉬운 사람이 바로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고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가장 힘든 사람들이 바로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입니다. 고아와 객과 과부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가난하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난하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가난해져야 합니까? 일부러 돈을 안 벌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돈도 많이 버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돈을 많이 벌면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가는 곳이 달라지고 우리가 쓰는 물건이 달라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가난한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가난한 교회의 시선은 가난한 자들에게 머무르게 마련입니다. 작은 교회의 시선은 작은 자들에게 머뭅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시선이 머물게 마련입니다. 다행히 길벗 교회는, 여기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다행히 길벗교회는 작고 가난한 교회입니다. 여러분 작은 교회 다니는 게 불편하잖아요. 주차장도 제대로 없고, 예배실도 지하이고, 아이들 돌봐주는 선생님도 없고요.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교회, 부자 교회 다니고 싶어 합니다. 자신들은 가난하더라도 교회라도 부자 교회 다니고 싶어 합니다. 으리으리한 예배실에 듣기 좋은 성가대가 있고, 오케스트라 악기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아이들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부자 교회 다니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는 작은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크고 멋있는 교회가 아닌 작고 건강한 교회가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몇 달 전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에 타서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는데요. 하지만,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술적 가치는 있죠. 그러나 크고 멋있는 성당이나 교회는 부유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쉽습니다. 오갈 데 없었던 제가 길벗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도 길벗교회가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가능했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생각이 많아지고요.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해관계를 따져야 하니까요. 교회는 그런 곳이 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작은 교회를 섬기시는 여러분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세상에는 웅장하고 휘황찬란한 교회보다 작고 건강한 교회가 늘어나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볼 때 있잖아요. “너 어느 교회 다녀?” “길벗교회라고 작은 개척교회 다녀.” 그러면 사람들이 왜 그런 교회를 다니냐는 듯의 눈빛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다음 질문은 이런 것이 되야죠. “그 교회 좋아?” “응, 좋아. 너도 우리 교회 다닐래?” 그런데, 사람들은 작은 개척 교회라는 말에서 관심을 멈춥니다. 세상은 아직 이러합니다. 왜 작은 개척 교회를 다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말해 줍시다. 왜 교회가 작아야 하는지 설명해 줍시다. 성경이 줄기차게 제시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려 줍시다. 교회는 세상과는 확실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진중한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분위기에 휩쓸려 다니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신념과 행동이 언젠가는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작은 교회를 지키는 여러분은 이미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더 큰 복 있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 함께 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세상, 하나님이 원하시고, 예수님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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