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길벗설교6] 겨자씨만 한 믿음 (마태복음 17:20)

설왕은 2019. 8. 4. 20:35
(마 17:20, 개정)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지난 6월 30일에 제가 시편 1편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제목은 복 있는 사람이었고요. 복 있는 사람이라는 설교가 제게 좀 강렬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는 설교할 때 저도 마치 청중처럼 함께 듣습니다. 저는 설교란 설교자가 청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번에 설교한 후에 한 달 동안 ‘아 진짜 복 있는 사람 돼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뭐가 필요할까?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가 보통 설교를 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나면 다음에 무슨 설교를 할지 구상이 떠오르거든요. 이번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본문을 정하고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마음에 별로 내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말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 달 전쯤에 전에 회사 다닐 때 동료분들 몇 분을 만났거든요. 제가 회사 다닐 때가 벌써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만났던 분 중에 한 분이 제가 소속된 팀에 팀장님이셨는데 제 유투브를 통해서 제 설교를 들으시는 거예요. (아마 이 설교도 들으실 것 같아요.)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그분이 기독교인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죠. “교회 다니셨어요?” 그러니까 다니신다고 그렇게 대답을 하시면서 자신의 신앙은 아주 대단한 것은 아니고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이셨어요. 저는 당장에 겨자씨 믿음의 다음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모임에서 동료분 한 분이 저한테 묻더라고요. “회사 다니고 그랬던 것 좀 아깝지 않아요?” 집에 와서도 아내가 저한테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만나니까 부럽지 않아?” 그분들이 전에는 같이 벤처에서 고생하던 분들이었지만 지금은 20년이 지났잖아요. 다들 직급이나 하는 일이 어마어마하시더라고요. 거의 다 임원 또는 사장급이고 당연히 집도 있고 좋은 차도 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별로 부럽지는 않더라고요. 그런데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부러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겨자씨만 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나는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나? 나는 목사인데 그래도 믿음이 콩알 정도 크기는 되야 할 텐데…’ 점검해 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단순한 논리입니다. 그러면 산을 옮길 수 없다면, 겨자씨만 한 믿음이 없는 것이죠. 여기서 산은 진짜 산이 아닙니다.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보통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그랬는데 저는 산을 옮길 만한 호연지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좀 복잡하고 내용이 좀 깁니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어서요. 논지가 흐려질 수 있어서 아주 단순하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제자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이가 귀신 들렸다고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보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 웅성웅성하고 있는 와중에 예수님과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돌아옵니다. 그때 그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해서 그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왜 못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신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에게 명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으니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축귀, 그러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거에요. 요새는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런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다, 혹은 꿈에서 귀신을 만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이 명령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안 계실 때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면서 이 말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만약 이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귀신이 물러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키워서 최소한 겨자씨만 하게 만들 수 있을지 진지하게 연구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제 추측으로는요. 제자들은 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을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였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이었냐면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수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도 없었습니다. 대장이 빠지고 에이스들도 모조리 빠진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신감이 크게 결여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도와줄 수 없다고 지레 겁을 먹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요. 9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9장 49절, 50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눅 9:49-50, 개정) 『[49] 요한이 여쭈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도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는데 그 사람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믿음이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 오늘 이 사건이 있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훌륭하게 수행해 냅니다. 예수님이 70인을 따로 세워서 둘씩 짝을 지어 보냅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에 나온 말입니다. (눅 10:17, 개정)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믿음이 작은 사람들이 갑자기 믿음이 커졌을까요? 여기서도 보면 이렇게 나오죠.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요.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한 사건 이후로 이들뿐만이 아니라 그 주위에 사람들도 어떻게 해야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지 깨닫고 담대하게 그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넷째, 오늘 본문을 잘 보면 그런 암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으면 이 산에게 명령할 것입니다. ‘여기서 저기로 움직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한 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산에게 명령할 수 있고 명령할 것이라고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추론해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아닌지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이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담대하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 쭈빗쭈빗하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당황해서 또 머뭇거렸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이들이 믿음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습니다. 이들이 믿음이 있었다면 담대하게 명령하며 귀신을 쫓아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별일도 아니었습니다. 말만 하는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이 이 일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중에 유투브에 설교 예고 영상을 올리면서 숙제를 하나 드렸는데요. 다들,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테레사 수녀님에 관한 일화를 제가 전에도 설교할 때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다시 한 번 짧게 언급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캘거타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테레사 수녀님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무엇을 도와드려야 하는지 물었죠. 그러자 그 사람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확실하게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님이 그 요청을 거절하면서 확실함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지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테레사 수녀님의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확실함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제가 믿음과 확실함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그렇게 영상을 올렸습니다. 


믿음과 확실함의 관계에 대해서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신앙을 갖게 되는 순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모태신앙도 있겠지만 살다가 중간에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는 대개 어떤 경우입니까? 삶이 불확실해질 때입니다. 보통은 병에 걸렸을 때 그래서 내가 살지 죽을지 모르게 되는 경우에 신앙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젊었을 때는 교회를 떠났다가도 나이가 들어서 몸이 약해지면 돌아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삶이 점점 불확실해지거든요. 또는 가난한 사람들이요. 당장에 먹고 살 일이 매우 걱정이 되는 사람들은 삶이 매우 불확실한 사람들입니다. 부유한 분들보다 가난한 분들이 신앙을 가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투명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누군가를 붙잡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을 가질 때 누군가를 믿을 때 우리가 자연스럽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확실함에서 벗어나 확실함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기를 원합니다. 병이 낫기를 기도하고요.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아이들이 공부 잘하기를 기도하고요. 우리 아이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안정을 원하고 확실함을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확실해지고 안정이 되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될까요? 작아지고 약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필요가 점점 없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확실한 것을 원해서 그래서 우리의 삶이 점점 더 확실해지면 우리의 믿음은 점점 더 약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약해지고 믿음이 작아져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고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신앙을 이용해서 확실함과 안정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죠. 하나님과의 관계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반응은 이래야 합니다. ‘아. 그러면 문제가 좀 있는데, 나는 무엇을 구해야 되지?’ 이렇게 고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정말 부유하고 건강하게 살고 우리 아이들도 다 잘 되고 그래도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네, 물론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도 어떤 사람은 손잡이를 꽉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잡이를 계속 꽉 잡을 수 있을까요? 상황이 손잡이를 꽉 잡아야 하는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요. 여러분의 미래를 확실히 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까? 기도를 하건 말건 간에 미래는 정해져 있고 그대로 이루어진다면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어떤 일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삶에 불확실한 것이 줄어들고 안정이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나쁜 것이 아니죠. 우리의 미래가 장밋빛으로 훤하게 보인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추구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장밋빛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확실한 것은 버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예수님은 극단적으로 확실한 것들을 버리셨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불확실성 속에 놓아 두셨습니다. 

 


확실함과 안정을 원한다면 산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면 안 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 서서 그 일을 시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사람들은 산을 옮기기 보다는 스스로 산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 사회가 잘못되어 있고, 기득권 세력이 부패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맞서서 저항하고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 앞에 서서 그 산에 맞서야 합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떨리는 일입니까? 제가 전에 회사 다닐 때 일입니다. 프로젝트를 수주를 해야 돈을 벌잖아요. 그런데 큰 프로젝트는 항상 큰 회사에 뺏기는 겁니다. 대표적인 회사가 삼성 SDS였는데요. 거의 항상 우리 회사는 프로젝트 수주에서 밀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 삼아 후배들,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삼성이랑 싸우지 마라. 가능하면, 할 수만 있다면 삼성에 들어가라.” 좋은 생각 아닙니까? 지금도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한창입니다. 이기기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제가 방금 얘기한 것처럼 일본과 싸우지 말고 일본 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산에게 맞서기보다는 산의 일부가 되거나 우리 스스로가 산이 되고 싶어 합니다. 확실함과 안정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기득권 세력에 편입해야 합니다. 산에 맞서기보다는 산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제안한 방법입니다. “예수님, 이 나라의 왕이 되십시오. 산의 정상에 우뚝 서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군림하기보다는 산을 옮기기로 마음먹으시고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힘이 있는 나라가 힘이 없는 나라를 수탈하고 강제 징용하고 어린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고 그래서 이제 우리가 배상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하는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경제 침략을 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의 편에 서는 것이 맞습니까? 우리가 이 산을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했던 행동이 바로 그런 행동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우월한 위치에서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고 소외된 자들을 핍박하고 자신의 거룩함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아픔에 눈을 감고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안식일에 병든 자를 방치해 두었고,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의 몸을 팔아야 했을지도 모르는 여인을 돌로 쳐야 한다고 예수님 앞에서 목에 핏대를 올렸습니다. 자비와 긍휼과 용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이었고 산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셨고 당당히 맞서셨습니다. 독사의 자식이라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고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 주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산이 되고 싶어 합니다.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산이 되고 싶습니까, 산을 옮기고 싶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산을 옮기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삶이 불안하잖아요. “하나님 지금은 못하겠습니다. 제 삶이 좀 안정되고 여유와 여력이 생기면 그때 생각해 볼게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서 살까 근심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님의 말씀은요. “너희들의 삶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먼저 안정과 확실을 구하지 말아라. 이것은 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그것을 구해라.” 산을 옮기는 일, 지금 당장 우리는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삶을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산이 되고 싶습니까, 산을 흔들고 싶습니까? 기득권 세력에 편입해서 산의 일부가 되어서 나는 괜찮다 우리 아이들은 괜찮다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회 부조리에 맞서고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가시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물어보면 혹은 설문조사를 하면 다들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산을 흔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호언장담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를 택합니다. 후자를 말하면서 전자를 택하죠.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산에게 명령하여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산을 옮기기 위해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겨자씨 한 알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사는데요.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으로 하나님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이 세상에 작은 구멍을 내고 불확실해 보이는 존재인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는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귀신이 도망갈지 아니면 자신에게 달려들지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용기를 내서 그 이름의 능력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대단한 일들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있을지도 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을지도 몰라’하고 생각하며 시도해 본 것입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다면요. 우리는 산을 흔들 수 있습니다. 거대한 산이 우리 눈 앞을 막을지라도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이렇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이건 아니지. 이건 옳지 않지. 평지가 되어라.” 모든 일의 시작은 항상 작습니다. 가장 위대한 일도 정말 하찮은 일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작은 믿음으로 거대한 산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부담스러우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목사님 왜 여기에 계십니까, 저기 큰 교회로 가시죠. 제가 자리를 다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러면 제 마음이 매우 흔들릴 것입니다. 확실한 곳에 가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 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확실한 것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확실한 것을 추구하지는 맙시다. 우리의 삶이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확실해질 때 하나님께서 그러한 복을 내려주셨다고 하나님 잘 믿었더니 복을 받았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산을 흔들어 평지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가능하다면 우리 불확실한 곳에 섭시다. 가능하다면 확실함을 좀 더 버려 봅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흔들리더라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흔들리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선택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 선택인지 다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고 단념하며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는 가진 게 없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라고 생각하며 좌절하지 마십시오. 산을 옮기는 것은 돈도 아니고 힘도 아닙니다. 우리의 겨자씨만 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말, 우리의 작은 행동으로 산은 우리 앞에서 떨기 시작할 것입니다. 작디작은 믿음으로 거대하고 굳건해 보이는 이 세상을 흔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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