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20분설교] 용서의 기초 (용서 1, 누가복음 7:36~47)

설왕은 2019. 5. 26. 16:54


(눅 7:36-47, 개정)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2. 본문 설명

오늘은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함께 식사하기를 청했습니다. 아마, 성경을 좀 아시는 분들은 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졸졸 쫓아 다녔죠. 예수님이 좋아서 쫓아다닌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싫어서 따라 다녔습니다. 마치 사찰이나 감시를 하기 위해서 쫓아다닌 것이죠. 몰래 쫓아다닐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냥 대놓고 따라 다녔습니다. 뭐 책 잡을 것 없나, 뭐 흠 잡을 것 없나, 뭐 잘못하는 것 없나 잡아내려고 항상 예수님 곁에 있었죠. 그리고 예수님도 바리새인을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평가가 신랄했습니다. ‘독사의 자식’, ‘하얗게 화장한 무덤’ 따위의 비유로 말씀하시곤 했죠. 그런데 어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바리새인은 거의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털어도 먼지가 안 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리새인이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을 초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가 앉으셨는데 그 동네에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죄인이라는 표현은 창녀, 즉 몸을 파는 여자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이 여인이 향유 옥합 한 병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마, 이 여인이 집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여인의 행동이 매우 재빨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간에 왜 왔냐고 물어보고 그 여인의 행동을 저지하거나 이런 저런 상황 묘사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야기 진행이 엄청 빠릅니다. 이 여인은 들어오자마자 예수님을 찾아가서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무슨 사정으로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아볼 틈이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이 마음에 혼자 한 말을 누가복음 저자가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바리새인만이 한 생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했던 생각이었죠. 그리고 바리새인은 그 표정으로 이미 그 생각을 다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예수가 정말 진짜 선지자라면 이 여자를 가만 놔두었을 리가 없다. 이 여자는 죄인이지 않은가?’ 사람들의 당황스럽고 언짢은 표정과 분위기가 느껴지십니까? 사람들이 ‘이 분위기를 어쩌지?’라고 생각하는 있는데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을 부릅니다. “시몬씨, 할 말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반말로 말하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존댓말로 말하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집에 누군가를 초대했다는 것은 그에게 아내가 있고 가족이 있을 가능성이 높고요. 예수님의 나이를 서른 살 정도로 생각하면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님은 거의 항상 반말, 예수님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항상 존댓말을 씁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반영된 번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유대인들이 쓰는 말은 우리말과 같이 반말, 존댓말이 분명하지 않고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매우 정중하고 신사답게 말을 하셨을 확률이 높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야”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 않으셨을 겁니다. 


다시요. 예수님이 시몬을 부릅니다. “시몬씨, 할 말이 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그 여인으로부터 예수님과 시몬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시몬이 답합니다. “말씀하시죠.” 예수님이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어떤 사람이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한 사람에게는 오천만원을 한 사람에게는 오백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갚을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둘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고마워하고, 누가 더 그 돈 빌려 주었던 사람을 사랑할까요?” 시몬이 대답합니다. “당연히 오천만원 탕감받은 사람이겠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에 시몬씨는 내게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자신의 눈물과 자신의 머리털로 내 발을 씻겼습니다. 시몬씨는 내게 입맞추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내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내 발에 부었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이 내용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3. 원리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이미 예수님께서 정리해 주셨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많이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적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많이 사랑하려면 많이 용서받아야 하는데 나는 많이 용서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많이 용서받기 위해서 일단 죄를 많이 지어야 하는 것일까요? 죄를 많이 지어야 많이 용서받을 수 있고 그래야 많이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용서는 기독교에서 가장 복잡한 주제이면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난해하고 또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최종 목표 지점이기도 합니다. 용서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시간 동안 이야기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딱 한 가지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유 없이 그냥 용서하셨습니다. 이 말이 어려운 말이 아닌데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회개와 용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이런 말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논리 구조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해야 용서를 받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주장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용서의 구조는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습니다. 회개하십시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용서받았는데 굳이 왜 또 회개를 해야 할까요?  일반적인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보통은 회개가 먼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요. 분명히 용서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회개는 이런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그래,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래 소상하게 말해 보거라.” 그러면 우리가 우리 죄를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저는 이런이런 죄를 지었고 이런이런 잘못을 했고 이런이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 그래. 너는 네 죄를 잘 알고 있고 뉘우치고 있구나. 너의 죄를 용서하겠다.”라고 말씀하시죠.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선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5장 7절, 8절 말씀입니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의인은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불의를 보면 달려드는 사람입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인은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죠. 착하고 친절한 사람입니다. 선인은 나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죽는 사람은 가끔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도 않고 스스로 죄인인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예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마 탕자의 비유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떠나서 그 돈을 다 탕진하고 거지꼴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언제 용서했습니까? 그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 제가 죄인입니다. 아들로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하인이나 노예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고백했을 때 그때 아버지가 용서했습니까? “그래, 네 잘못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라고 말했습니까? 아들이 잘못을 말하기 전에 이미 용서는 일어났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하는 회개의 말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뭐라고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오늘은 파티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 제가 이런이런 잘못을 했습니다.”라고 자세하게 말을 하면 그 말에 의해서 우리를 용서하실까요? “아이고, 너는 네 죄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아니? 내가 널 용서하겠다.”라고 말씀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이 여인은 용서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용서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용서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용서는 ‘다시 손을 내밀어 주는 것’입니다. 용서는 ‘다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에게 ‘다시 웃어 주는 것’입니다. 용서는 ‘다시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했다고 해봅시다. 마음으로 “저 사람은 진짜 나쁜 사람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오면 어떻겠습니까? 온갖 나쁜 얘기들, 뒷담화가 오고 가겠죠.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 그 사람은 진짜 나쁜 사람이네.’ 확증편향을 가지게 됩니다. 용서는 이것의 반대입니다.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도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확실한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앞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와 정상적인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다시금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으로 다시금 초대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4. 적용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이 있다, 없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용서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무조건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도 무조건 용서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1000만원을 빚졌는데 그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받았다면 나에게 10만원 빚진 사람에게 나도 아무 조건 없이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용서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기초입니다. 그러면 또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습니다. ‘아, 세상에 진짜 나쁜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연쇄살인범, 유괴살인범, 연쇄방화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아, 못할 것 같은데……’ 이런 고민이 될 수 있습니다. 잠깐 이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큰 길에 있는 마트에 종종 가는데요. 본죽 집 창문에 공유 사진이 크게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죠. 아내가 저한테 “저 사진 너무 부담스럽지 않아?”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니요, 나는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은데요.” 공유가 여러분에게 죽을 끓여 드릴려고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유는 우리에게 애틋한 마음이 없습니다. ‘왜 나를 저렇게 쳐다볼까, 부담스럽게’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쓸데없는 부담감입니다. 여러분 용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언제 연쇄살인범, 연쇄방화범, 혹은 진짜 악마 같은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겠습니까? 그럴 일은 매우 드물죠. 물론, 살다 보면 정말 악마 같은 나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을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연쇄살인범이나 방화범과 같은 나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어떻게 용서할까로 시작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시작합시다.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과 가장 자주 부딪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마, 결혼하신 분들은 배우자, 혹은 자녀일 것입니다. 남편이 분명히 나에게 잘못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퇴근한 남편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니, 집구석이 왜 이렇게 엉망이야. 하루종일 집에서 놀면서 뭐했어?” 제가 이 말을 하면서 섬뜩한 기분이 드네요. 분명한 잘못입니다. 그럼 이 남편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는 이런 말 못하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짐을 싸서 친정에 가서 남편이 정식을 사과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남편과 말을 섞지 않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확실히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벌이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자녀가 잘못했을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녀에게 교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심하게 벌을 줄 때가 있습니다. 자녀를 때린다거나 혹은 심한 창피나 모욕감을 준다거나 자녀의 미래를 저주하거나 자녀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훼손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이라고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아파야 해. 그래야 니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게 되지.’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를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으로 말이죠. 그래야 다음에 다시는 이런 행동을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조건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배우자를, 우리의 자녀를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다시 손을 잡아 주고 다시 웃어 주고 다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제가 만약 하나님이라면요. 누군가가 유창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면 이렇게 한 번 물어볼 것 같습니다. “와, 그렇게 네가 한 행동이 잘못된 것인 줄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랬니? 알면서 왜 그랬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각하고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보통 우리가 짓는 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사람들, 혹은 실제로 그 일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개구리의 입장이 되거나 그 입장을 짐작해 보기 전까지는 우리는 무심코 던지는 돌이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회개를 해야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가 먼저입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만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연못이나 논두렁에 무심코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 돌이 개구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관계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을 하나만 나누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아들이 둘 있습니다. 이 친구들이 사춘기입니다. 얘네들이 말을 좀 막 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1박 2일에서 유해진 씨가 젊은 사람과 아저씨의 차이점에 대해서 했던 말이 있는데요. 나이든 사람들은 말을 할 때 흥얼거리거나 가락을 넣죠. “아이고, 오늘은 또, 택배가 뭐가 왔나 함 보자.”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감정 없이 말을 한다고 합니다. “헐 대박, 택배 벌써 왔어. 완전 좋아.” 이렇게 말에 감정을 담지 않고 말을 한다고 하네요. 저도 아저씨가 되어서 젊은 사람 흉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아저씨들은 이렇게 말을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나이가 들면 대체로 감정에 더 예민해지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 실패도 하고 회사에서 실직하기도 하고 다 큰 어른인데 직장 상사한테 혼나기도 하고요.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어른답지 못하게 구는 자기 자신한테 실망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젊은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강하고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자신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좀 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팩트 폭행을 하죠. 저희 애들이 저와 제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엄마는 나이 들었잖아. 아빠는 돈 못 벌잖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돌을 맞고 개구리는 다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가끔 말합니다. “엄마랑 아빠도 사람이야. 감정이라는 게 있다고.” 그런데 제가 개구리가 되고 나서 알았습니다. 저도 수도 없이 엄마, 아빠에게 그런 돌을 던졌다는 사실을요.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몰랐지만, 나는 용서받았었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회개를 해야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관계의 발전이 회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 사람들을 그냥 용서합시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의 형제자매에게 먼저 실천합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줍시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용서이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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