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신학노트] 중생과 칭의, 그리고 구원

설왕은 2019. 7. 28. 09:57

중생과 칭의라는 말 자체가 어렵습니다. 중생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고 칭의는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중생은 Regeneration 칭의는 그냥 Justification입니다. 우리말과 완전히 같은 뜻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지속된 논쟁 중의 하나가 디시 태어남이 먼저냐 아니면 의롭다 함이 먼저냐 입니다. 두 가지 주장 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에도 문제가 있는데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너 정말 이제 새롭게 거듭나야 하지 않겠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 말에는 거듭남에는 자신의 의지와 행동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처럼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래 다시 태어남의 의미는 태어남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폴 틸리히는 중생을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현실 속으로 이끌려 있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270, 틸리히, 조직신학 3) 좋은 설명입니다. 중생은 일종의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개인이 어떤 노력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틸리히의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현실로 이끌림을 받는다면 중생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궁금하고 알고 싶고 그렇다면 영향력을 받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이 일어났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중생이 객관적인 상황이라면 칭의는 주관적인 노력이나 수용일까요? 아닙니다. 칭의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요. 이것 역시 객관적인 상황이 먼저입니다. 의롭다고 선언하는 쪽은 하나님입니다. 소외의 극복, 재결합은 하나님 쪽에서 시작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이것은 정말 중요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틸리히는 인간은 칭의를 통해 자신이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받아들여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구원의 역설이며, 이 역설이 없다면 어떠한 구원도 있을 수 없고 단지 절망만 있을 것이다." (273, 틸리히, 조직신학 3)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말을 오해할 때가 많은데요. 구원은 믿음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없이 구원이 일어나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분명히 믿음 없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루터가 믿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이 구원에 절대적인 조건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수가 병자들을 치료할 때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그냥 손을 잡아 일으키고 눈을 만져 보게 하고 죽어 있던 나사로에게 명령하죠. 나사로의 경우에만 살펴 보아도 그렇죠. 죽은 사람에게 무슨 믿음이 있었겠습니까?

 

칭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의롭다 함"입니다. 칭의의 완성이 구원이기도 하고요. 

 

이런 예로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영희는 사과를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과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사과를 주어야 영희는 사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철수가 와서 영희에게 사과를 줍니다. 영희는 사과를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영희는 선택할 수 있지만 철수가 사과를 주지 않았다면 영희에게는 이런 선택권이 없는 것이죠. 사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는 것은 믿음이죠. 사과 없이 사과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은혜 없이 믿음으로 칭의 혹은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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