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신학노트]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기본 구조)

설왕은 2019. 4. 18. 22:42


믿음에는 기본 구조가 있습니다. 믿음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의식에는 기본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현상학을 만든 후설은 인간의 의식은 항상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믿음은 당연히 인간의 의식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하이데거를 비롯한 후설 이후의 현상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인간 의식에 관한 기본 구조, 즉 의식은 항상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별다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현상학의 기본 전제와 같은 주장이지만 사실 인간의 정신적 작용에는 그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수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주목해 왔습니다. 


믿음에는 항상 믿음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이론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사항입니다. 믿음은 단지 인간의 내적 작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믿습니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당신은 믿습니까?"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믿음은 주어는 있지만 목적어가 없습니다. 믿음을 말할 때 내가 믿든지 아니면 당신이 믿든지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같은 인간의 정신 작용에는 믿음의 주체가 있고 반드시 믿음의 대상이 존재해야 합니다. 대상이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즉, 우리는 믿음을 말할 때 그 대상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정확히 지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플라톤의 향연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에로스는 특정 대상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 (플라톤, 향연, 박희영 역, 108)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사랑은 항상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한다고 주지시킵니다. 사랑은 그냥 나의 내부에서 뜨겁게 불타오르는 내적 감정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대상을 향한 사랑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주장하는 틸리히도 이러한 구조에 대해서 주의하고 있습니다. 틸리히는 믿음을 '관심을 가지는 존재'와 '관심을 받는 존재'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최규택 역, 41) 믿음은 '나의 안'에 있는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항상 대상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믿음을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내적 확신이나 느낌보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훨씬 더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 있어서 한스 큉의 지적은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틴 교회의 위대한 스승 히뽀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찍이 구분했던 대로다. "어떤 것을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뿐 아닐, "어떤 분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오래된 "믿나이다"(Credo)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 성서가 아니라 (개신교회의 성서주의를 거슬러) 

성서가 증언하는 그분을 믿는 것이요 

- 전통이 아니라 (동방 정교회의 전통주의를 거슬러)

전통이 전해주는 그분을 믿는 것이며,

- 교회가 아니라 (로마 천주교회의 권위주의를 거슬러)

교회가 선포하는 그분을 믿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교회일치적인 고백이다.

"하나님을 믿나이다!" (Credo in Deum) (한스 큉, 현대인을 위한 사도신경 해설 믿나이다, 이종한 역, 23)


그리스도인은 성경이나 전통, 교회, 경험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 전통, 교회, 경험이 전혀 없이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성경, 전통, 교회, 경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믿음의 대상은 예수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믿음의 대상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참고서적

플라톤, 향연, 박희영 역

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최규택 역, 그루터기 하우스

한스 큉, 현대인을 위한 사도신경 해설 믿나이다,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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