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길벗설교8] 하나님의 맛_시편 34편

설왕은 2019. 9. 29. 16:24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시 34, 개정)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와 지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번 달은 다섯 주나 있어서 제가 오래간만에 이 곳에 섰습니다. 한 주 차이인데 되게 오래간만에 설교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했던 설교 머릿속에 떠올려 봅시다. 기억나시죠? 네, 됐습니다. 오늘은 바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편 34편은 구조가 독특합니다. 이런 식의 구조를 가진 시편이 몇 개 있는데 이런 구조를 일컫는 말도 있더라고요. 굳이 어려운 이름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저라면 좀 쉽게 이름을 붙였을 텐데요. 쉽게 말하면 이 시편은 가나다 시편입니다. 히브리어의 알파벳의 순서대로 한 절 한 절 지어진 시편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가나다라마바사하자차카타파하의 각 글자로 각각의 절이 시작됩니다. 삼행시 같은 형태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14 행시일 텐데 히브리어는 알파벳이 20개 이상이라서 20절 이상이 되었습니다.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흐름이 좀 자연스럽지 않고 뭔가 건너뛰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삼행시가 논리가 자연스럽지 않지만 동시에 또 탁월한 통찰이 들어가거나 해학이나 유머가 들어갈 때가 있는 것처럼 이 시편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34편을 한 절 한 절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서로가 힘들어지겠죠? 중요한 부분만 포인트를 짚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 집중할 구절은 8절, 9절입니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알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맛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맛을 보는 것, 맛을 느끼는 것은 굉장히 강렬한 경험입니다. 다이어트가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입이 조정이 안 됩니다. 입이 생각대로 안 됩니다. 음식을 먹는 순간 사고가 멈추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 그만 먹어야 하는데’하고 생각은 하는데 손과 입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이성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몇 주 전에 아는 목사님을 만났는데요. 그분도 정말 열심히 목회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살이 좀 찌셨어요. 어떤 사람이 그 목사님으로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야, 너 목회 힘들다더니 살만한가 보다.” 스트레스받으면 살이 찌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스트레스받으면 왜 살이 찝니까? 마음으로 생각으로는 괴로운데 뭔가 맛있는 걸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괴로움이 어느 정도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받으면 먹는 걸로 푸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먹는 것을 멈추면 다시 괴로우니까 멈추기가 싫은 것이죠. 뭘 먹을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눈물은 아래도 떨어져도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 특별히 맛있는 것 먹을 때면 기분이 좋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맛있는 것 먹을 때 기분이 나쁠 때가 있는데요. 언제냐면 금방 배부를 때입니다. 더 먹고 싶은데 더 못 먹을 정도로 배가 부르면 그때 기분이 나빠집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먹방이 굉장히 많이 방송되고 있습니다. 유튜브로도 먹방은 아직도 인기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저는 맛있는 것 먹는 것보다 사람들의 표정 보는 것이 재밌는 것 같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요. 사람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요. 저절로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사람을 웃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웃더라고요.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처럼 맛을 본다는 것은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하고 자기도 모르게 몸이 막 반응하는 신기한 경험입니다. 우리도 독서 모임에서 서로 나누었잖아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즐거운 기억을 서로 나눌 때 어땠습니까? 맛있는 것을 먹은 기억을 말씀하시는 분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맛을 보는 것은 우리의 정신으로 또한 몸으로 기억이 남는 강렬한 경험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런 기도 많이 하잖아요.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세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보여 주세요.” 그런데요. 이것보다 사실 더 강렬한 경험은 하나님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면 어떨까요? “하나님, 하나님을 맛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맛을 알기 원합니다.”


여기서 제가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골라 보세요. 제가 정말 기가 막힌 맛집을 알고 있는데요. 제가 그 맛집에서 먹은 것을 아주 기똥차게 설명을 해드릴까요, 아니면 그 맛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드릴까요?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맛이 어떤지 궁금하시죠? 여러분, 하나님의 맛을 알기를 원하신다면 설명을 듣는 걸로는 만족하실 수 없을 겁니다. 직접 하나님의 맛을 경험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에서도요. 하나님의 맛이 어떤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만 나와 있죠. 그런데 하나님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시편을 잘 보면 나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일 텐데요. 일단 시편 기자가 언제 이 시편을 썼는지 살펴봅시다. 시편 기자는 시편 34편 제목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지난주에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 기억하십니까? 다윗을 죽이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니까 왕의 명령을 받는 사람들은 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대적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보호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아기스 왕이 다윗을 가두어 버립니다. 다윗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척해서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오랫동안 살해 위협을 당했던 다윗이었는데요. 다윗은 이 와중에 하나님의 맛을 본 것 같습니다. 약간 의외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보통 보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주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이 어떤 일에 성공했을 때 그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했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축구 선수 중에 골을 넣으면 기도하는 선수도 있기도 했습니다. 그 축구선수는 골맛이 하나님의 맛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경험은 다릅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 다닐 때 하나님의 맛을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것이 진짜 하나님의 맛입니다. 그 축구선수가 경험한 것은 성공의 맛입니다. 우리는 성공의 맛과 하나님의 맛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하나님의 맛을 볼 수 있는 곳을 알려 드립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가까이 계시는지 나와 있습니다. 누구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나와 있습니까?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 영어로는 “the brokenhearted”입니다. 심장이 깨진 자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나와 있습니까?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입니다. 영어 표현이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The crushed in spirit입니다. 영적으로 아주 짜부라져서 으깨어져 버린 사람입니다. 심장이 깨지고 마음이 으깨어져 버린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심장이 깨진 것 같고 마음이 산산조각 나버린 사람 가까이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다윗의 경험이었습니다. 다윗의 경험을 한 번 짐작해 보십시오. 침 흘리면서 미친 척해서 겨우 살아났지만 그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단순히 좋기만 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그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미친 척하면서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네가 없어져야 우리가 다 평안해질 거야. 너는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달려드는 상황 속에서 다윗은 존재 자체가 흔들렸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죽기를 바라는 이 상황에서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고민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매우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윗을 멀리했습니다. 다윗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나도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나 자신도 나 자신에게 멀어져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변장을 하고 다니거나 혹은 미친 척을 해야 했습니다. 다윗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겠습니까?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내가 다윗이다.”라고 외치기만 해도 그는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친 척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했을까요? 침을 쓱 닦으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기름부음 받은 자 다윗이다”라고 사람들 앞에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심장이 깨지고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상황 속에서,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다윗은 그의 존재를 가능케 했고 그의 존재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마치 물 위를 걷다가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순간에 베드로가 경험했던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처럼 다윗은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하나님의 맛을 느꼈습니다. 그를 붙드시는 그를 지탱하는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맛을 경험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이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갈대는 바람이 불면 쉽게 흔들리잖아요. 그런데 바람이 미치도록 불어도 갈대는 날아가 버리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뿌리 때문입니다. 갈대는 연약하지만 그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아주 날아가 버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존재가 미친 듯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그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맛을 느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여기 시편에도 나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요. 우리가 잘 못 살아서 고난이 닥칠 때도 있지만 우리가 잘 살아서 고난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다윗과 같은 그런 상황을 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요 그런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깨지고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경우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거나 회사에서 해고되면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자녀가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일 때면 마음이 깨지기도 합니다. 몇 년을 애써서 지탱해온 회사가 혹은 교회가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깨지고 낙심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또 하나 기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맛집 근처에 온 것입니다. 이 맛집의 이름은 ‘하나님의 맛집’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미치도록 흔들리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는 인생 최고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 제 가까이 계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맛보게 하여 주십시오.” 기왕 맛집 근처에 오셨는데 맛집에 들렀다 가셔야죠. 이 상황을 빨리 탈출해야지라고 빠져나갈 구멍도 찾으셔야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를 붙드시는,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시는 하나님의 맛을 경험하시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러나 마음이 깨지고 낙심된 사람이 무조건 하나님을 맛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맛집 근처에만 왔다가 가면 안 됩니다. 맛집에 들어가야죠. 어떻게 해야 우리는 하나님의 맛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시편 34편을 보시면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문자적으로는 ‘존경할 경’에 ‘두려워할 외’ 자니까 존경하고 두려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두려움이나 무서움과는 좀 다릅니다. 경외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드는 독특한 감정과 반응입니다. 마음이 낙심되고 깨어지는 상황은 두렵고 무서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서운 상황 속에서 또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상황도 무서운데 그 무서운 상황보다 하나님을 더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면서 벌벌 떨라는 말이 아닙니다. 방울뱀 소리를 내면서 나를 때릴 것처럼 위협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는 것은요. 하나님 앞에 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내 앞에 계신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 시편 34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11] 젊은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겠다. [12]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구냐?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또 누구냐? [13] 네 혀로 악한 말을 하지 말며, 네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14]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우리가 위험하다고 악을 행하면 안 됩니다. 전쟁을 하면 안 됩니다.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 입으로 독을 뱉어 내면 안 됩니다. 거짓말하고 사기를 치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할 때의 행동 양식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 것처럼 행동하면 이렇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을 조심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흔들립니까? 여러분이 무가치하게 느껴집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고 생각됩니까? 나 같은 사람은 없어져야 세상이 더 좋아지겠구나라는 우울한 생각까지 듭니까? 그렇다면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위기입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의 존재가 흔들릴 때 우리는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 위기를 이 비참한 순간들을 벗어나야겠다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맛보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제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 한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때는 전도사였습니다. “설 전도사님, 왜 신학을 공부하세요?” 되게 근본적인 질문이죠.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재미가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좀 놀란 것 같기도 하시고 의아해하시기도 한 것 같아요. “아, 재미로 신학을 하세요?” 그렇게 또 반문하시니까 또 제 대답이 너무 가볍게 느껴지더라고요. 아 내가 너무 가볍나? 그런데 제 솔직한 답변이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제가 공부한 신학적 지식과 지혜를 나누는 것이 재밌거든요. 시편 34편 설교를 준비하면서 재미의 어원을 찾아봤습니다. 재미는 우리나라 말인데요. 자미(滋味)라는 한자어가 어원이라고 합니다. 자미에서 자는 불어나다, 풍성하다의 의미이고요. 미는 맛 미입니다. 자미에서 자의 한자를 보면 왼쪽에 삼수변 그러니까 물 수가 있고 오른쪽에는 검을 현자 두 개가 붙어 있습니다. 물이 매우 많아서 검게 보이는 정도의 상황을 묘사하는 한자인 것 같습니다. 자미, 그러니까 재미라는 것은 아주 아주 풍성한 맛을 의미하는 것이죠. 재미가 있다는 것은 풍성한 맛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재미의 어원을 찾아보니까 저의 죄책감이 좀 사라졌습니다. ‘아, 그래 나는 하나님의 맛을 좀 아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부심도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맛있는 것 좋아하시죠? 맛있는 것 먹고 싶으시죠?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맛 중에 하나가 돈의 맛이죠. 그런데 돈맛을 본 사람들은 어째 좀 이상해지더라고요. 돈의 맛 좋죠. 그런데 돈의 맛이 참 인생의 맛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 것이라고 하니까 좀 어폐가 있는 것 같네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존재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 맛있는 것 먹으면서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캬… 이 맛에 내가 산다.” 우리를 살게 하는 가장 극강의 맛, 최고의 맛은 하나님의 맛입니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심장이 깨지고 마음이 산산조각 날 때도 하나님의 맛은 나를 살게 하는 맛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거대한 폭풍우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폭풍우는 지나갑니다. 경제적으로 더 나아질 기회도 생기고 사회적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혹은 우리 자녀가 성공해서 우리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환난을 면케 하시고 평안한 길로 인도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맛을 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광야를 헤매고 다니는 것 같은 힘든 시간들이 우리의 생명을 붙드시는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맛을 볼 수 있는 적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신 분들 부럽죠? 그러나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맛을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인생의 참맛을 모르고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요새 신구 선생님이 나오는 광고 보셨습니까? 저는 그 광고 보니까 너무 반갑더라고요. 저 미국 가기 전에 했던 광고 중에 히트 쳤던 광고 중 하나였는데요. 제가 찾아보니까 2002년에 했던 광고더라고요. 광고 카피 아시죠? “니들이 게맛을 알어?” 그런데 이번에는 “니들이 오징어 맛을 알아?” 이렇게 외치시더라고요. 그런데 광고를 보면 신구 선생님은 작은 조각배를 타고 오징어를 베고 누워 있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더 큰 배에서 조각배를 타고 지나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죠. 분명히 조각배를 탄 할아버지는 가난한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표정을 보면 할아버지가 이겼습니다. 우리는요. 어떤 맛을 알아야 할까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는 뭐라고 외쳐줘야 할까요? 오늘 배우셨죠. 어떻게요? 소리 내서 못하더라도 눈빛으로라도 이렇게 말해 줍시다. “니들이 하나님 맛을 알아?” 참 인생의 맛은 바로 하나님 맛입니다. 이 맛보다 더 맛있는 맛이 없습니다. 진정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게 하는 맛은 하나님의 맛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맛보기 원하십니까? 좀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심장이 깨지고 마음이 부서질 때 느낄 수 있다니까 두렵습니다. 하나님 맛을 보겠다고 일부러 그러지는 마십시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의인의 삶을 산다면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올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집니다. 그럴 때면 꼭 두 가지를 함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시련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 다른 하나는요. “하나님, 저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맛보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맛을 아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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