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길벗설교7] 예수님, 베드로, 그리고 마이클잭슨_마태복음 14:24-33

설왕은 2019. 8. 26. 06:45

( 14:24-33, 개정)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중요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만 했는데 벌써 절반은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좀 과장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고 또 시작이 좋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셨습니다. 일주일의 시작은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요일을 시작합니다. 오전 내내 자는 사람도 있고요. 여행을 가시는 분도 있고요. 목욕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고요. 집안 정리와 청소를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공부하거나 책을 보는 사람도 있겠네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또한 혼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주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은요. 혼자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이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좋은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집에 살면 잘 사는 것입니까? 제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좀 맛없는 것 먹어도 같이 먹고, 좋은 집에 안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이 살도록 창조되었고요. 함께 살지 않으면, 같이 살지 않으면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좋은 말을 건네며 함께 일주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아주 좋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설교하고 반성을 했습니다. 일단 좀 어려웠고요. 제가 듣기 싫은 설교를 했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지난 번의 설교 제목은 겨자씨만 한 믿음이었습니다. 중심 내용 중 하나는 불확실한 곳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죠. 불확실 곳에 서야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곳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가 그다지 없습니다. 그런데, 저도 불확실한 곳에 서는 것을 꺼려합니다. 어디 확실한 곳이 있고 제가 거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면 당장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확실한 것을 원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을 추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마음이 매우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주제가 훨씬 가볍습니다. 심각함보다는 즐거움으로 오늘 말씀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가셨고요.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여기서는 바다라고 나오는데요. 바다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밤에 출발했습니다. 밤에 출발한 것을 보니 원래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여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밤새 갈 계획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맞바람이 불어서 제대로 건너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밤새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밤 4경쯤이라고 나오는데요. 여기서 4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를 뜻합니다.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를 넷으로 나누어서 1, 2, 3, 4경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인 것이죠.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좀 짐작이 가시죠. 밤새 노를 저어서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려고 하는데 바람과 파도 때문에 제대로 건너갈 수가 없었고요. 잠을 잘 수도 없었을 테니 체력이 완전히 바닥이었을 테고 정신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겠죠. 밤이어서 제대로 앞이 보이지도 않고 체력도 완전히 방전되었고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조난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위급한 순간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다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물 위를 걸어올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자들이 두려움에 가득 차서 깜짝 놀라며 외쳤죠. “유령이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으면 저승사자다!”라고 소리쳤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제 정말 우리는 죽나 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저승사자 같아 보이던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나예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면 나한테 명령해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예수님은 주저함 없이 긍정의 답변을 보내셨습니다. “오세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습니다. 바람을 보니까 갑자기 무서웠습니다. 베드로는 물에 빠지기 시작했죠. 다급하게 외쳤어요. “주님, 구해 주세요.” 예수님이 재빠르게 오셔서 손을 내밀어서 베드로를 구해 주셨죠.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했습니까?”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절을 하며 고백했죠.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었을까 궁금하실 수도 있습니다. 과연 정말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을까,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믿는다면 물 위를 걷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죽음도 이기는 신이라면 물 위를 걷는 것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 눈에 안 띄게 몰래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려고 했는데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제자들의 눈에 우연찮게 눈에 띄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면서도 고침을 받는 사람에게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말라고 그러셨거든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주목을 받고 그 당시 예수를 예의 주시하던 위정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띄는 것은 원하지 않으셨거든요. 물 위를 걷는 것을 본 제자들이 또 어땠겠습니까? 당장에 소문을 냈겠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말씀을 하실 때가 많았는데요.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소곤거렸을 겁니다.

 

예수님, 지금 배 위에서 설교하시잖아. 근데, 저 배 필요 없다.”

무슨 말이야?”

예수님은 배 없어도 물 위에 서 계실 수 있어.”

뭐라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물 위에 서 있어?”

예수님은 할 수 있어. 내가 봤어.”

진짜? , 대박. 나도 한 번 보고 싶다.”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일로 주목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자랑하듯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당장에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에이, 말도 안돼.” 이런 것이 될 확률이 높으니까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면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물 위를 걸으셨습니까? 저희에게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아니면,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데요. 속임수 아닙니까?” 이것도 아니면 자기 뺨을 꼬집을 수도 있습니다. “이건, 꿈이야. 말도 안 돼.”라고.” 중얼거리면서요.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실, 이런 반응은 의외의 반응입니다. 뭔가 창의적이에요. 베드로가 외칩니다. “예수님, 정말 예수님이면 저도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씀을 나누고 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판단해 봅시다. 베드로의 행동, 잘한 것일까요? 잘못한 것일까요?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해야 할까요? 아니면 베드로 옆에 있던 제자들처럼 물 위로 뛰어드는 베드로를 구경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옆사람을 꾹꾹 찔러서 “니가 확인해봐.”라고 떠미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베드로를 칭찬합니다. 잘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전한 말씀에 의해서 판단해봅시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우리는 나눴습니다. 베드로는 동트기 전 이 새벽에 비몽사몽간에 체력이 모두 방전되고 시커먼 물이 마치 죽음의 파도처럼 배 안으로 쳐들어오는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나마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던 배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더 불확실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왜요, ?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요. 예수님이 오라고 했으니까요. 더 불확실한 곳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는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비몽사몽 간이던 제자들이 정신이 번쩍 들어서 구경을 했을 겁니다. “우와, 베드로. 대박.” “베드로 완전 멋있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멋있게 발걸음을 옮기던 베드로가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겁에 질려서 물에 빠져 버립니다. 물에 빠질 듯하다가 다시 올라와서 걸었다면 멋있었을 텐데, 베드로는 얼른 포기하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 살려 주세요.” 완전 멋있었는데, 스타일이 완전히 구겨졌습니다. 이러려고 내가 물 위를 걷겠다고 했나 자괴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두고두고 창피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 것인데 괜히 나서서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배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 가만히 있기를 잘했다.’.’ 베드로에게 이 경험은 어떤 교훈을 주었을까요? 베드로는 다음부터는 나서지 않겠다고, 함부로 예수님 따라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까요? 분명히 이 경험은 베드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경험도 잊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고요, 죽을 뻔했던 경험도 그랬을 테고요. 예수님이 자신을 구해 준 경험도 대단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두고두고 복기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왜 그때 물에 빠졌을까? 나는 왜 그때 잘 나가다가 실패했을까?’ 여기서 우리도 같이 한 번 생각해봅시다. 베드로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불확실한 곳에서 더 불확실한 곳으로 예수님의 말씀만 의지해서 뛰어들었습니다. 컴컴한 바다 위로 천근만근 같은 몸을 맡길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대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까요? 불확실함 위에서 걷고 있었는데 불확실함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순간이 언제였을까요? 거센 바람이 불었을 때였습니다. 바다 위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의 의미는 단지 바람이 아니죠. 그것은 곧 이어 커다란 파도가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바람이 오는 쪽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도 그곳에서 물결이 일렁이며 커다란 파도가 만들어지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베드로는 물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으로 인해 바다에 빠져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마도 베드로도 두고두고 상기했을 사실은, 우리의 믿음은 단단하게 고정된 덩어리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동산처럼, 아파트처럼, 우리 통장에 돈처럼 일단 한 번 쌓이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깜박깜박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없어질 때도 있습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다니고 헌금 많이 하고 찬양 열심히 부르면 믿음이 막 견고해져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 사실을 두고두고 기억했을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의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 후에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무서운 일이 예상되어서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불확실한 곳에 설 때마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고정시키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가 창피를 당하기는 했지만 이 일은 두고두고 베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 위를 한 번 걸어보고 싶으십니까? 물 위를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잠깐 샛길로 빠지겠습니다. (모르고 샛길로 빠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요새 쇼미더머니를 열심히 봅니다. 제가 원래 랩을 좋아하지는 않았는데요. 랩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요. 그리고, 따라 부를 수도 없고요. 좋은 노래는 따라 부르고 싶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그다지 감미롭게 들리지도 않고 욕도 많이 하고 해서 안 들었는데요. 저희 막내가 열심히 보고 내년에 쇼미더머니 나간다니까 제가 덩달아 같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계속 본방사수를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랩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서 얘기를 해 보면 형식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내용은 저급하고 저속하고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들도 있고 해서 불편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방송에서는 묵음 처리 해주니까 괜찮았습니다.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형식이었습니다. 랩을 할 때 보니까 비트만 주고 가사는 없어요. 가사는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만들어서 하더라고요. 남의 것을 따라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감 있게 하더라고요. 쇼미더머니 8에서 참가자들 중에도 인상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프로듀서 중에 비와이라는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람이 점잖으면서 자신감이 있고 그러면서 순수한 면도 있고 참가자들에게도 예의 있게 대하더라고요. 그래서 비와이가 쇼미더머니에서 불렀던 랩을 찾아서 들어봤습니다.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랩을 하는데 성경 구절을 말하고 자신의 신앙 고백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더라고요. 보통은 방송에 나와서 성경 내용 말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말하면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잖아요. “쟤는 왜 방송에 나와서 교회 얘기하냐?” 이러잖아요. 그런데,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제가 볼 때 내용면에서도 좋은 것들이 많았어요. “내가 왜 돈과 명예를 원해. 내가 이것보다 비싼데.” 쇼미더머니에서 관객들이나 평가를 하는 프로듀서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멋있어, 멋있어.” 이 말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랩 할 때 목에 핏줄이 너무 멋있었어요. 그거 계속 유지하시고요.” 제 눈에는 비와이가 멋있었습니다. 혼잣말로 물었죠. ‘,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크리스천들이 가지는 자신감은요, 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면서 자신감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자신감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신감입니다. 저는 비와이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어요.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 자신감을 뽐냅니다. 하지만 비와이는 엄마 아빠 앞에서 뛰노는 아이처럼 보였어요. 어린아이의 자신감의 근거는 엄마, 아빠가 옆에서 보고 있고 엄지를 들어 올려 주는 것을 보며 자신감을 가집니다.

 

세상은 우리를 길들이려고 합니다. 세상의 입맛대로 우리를 길들이려고 합니다.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는 말로 우리를 분노케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요. 저는 정치인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민생, 민생 할 때 좀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개돼지처럼 먹고 사는 문제 해결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말하는 것 같거든요. 먹고, 사는 문제 중요하죠. 하지만, 그것이 전부이거나 혹은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까? 직장 상사나 혹은 사장님은 자기 말대로 안 하면 회사에서 잘릴 거라고 위협하기도 하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도 눈을 감기도 하고요. 직장 동료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돈으로 길들이려고 합니다. “니가 누군지, 뭘 원하는지 정의, 자유, 개성 이런 것이 뭐가 중요해. 돈이 최고지. 돈 벌려면 이거 해야지. 안 그래?” “섣부르게 나서면 너도 잘려.. 가만히 있어.” 자본주의 사회가 왜 자본주의 사회입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고 아닙니까? “사람들 다 큰 교회 다니는데 너만 유별나게 작은 교회 다니고 그러냐. 돈 많은 교회에 다니는 게 좋잖아. 작은 교회, 불편하지 않아?”

 

물 위를 걸었던 예수님, 그리고 덩달아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이클 잭슨 좋아하세요?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아시죠? 다들 한 번씩은 따라 해 보셨을 거예요.. 해 보셨죠? 안 해보셨으면 오늘 집에 가셔서 한 번 해보세요. 해보면요. 아주 멋있게는 안 돼도 대충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대충은 따라 할 수 있는 문워크가 왜 사람들을 //시켰을까요?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죠. 사람은 다 이렇게 걸어다니는 거야. 중력 때문에,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걸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마이클 잭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중력, 중력 때문에 이렇게 걷는다고? 아니, 나는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걸을 거야.’ 인간이라면 다 중력의 영향을 받는 건데 마이클 잭슨은 중력이 없는 것처럼 걸어 다녔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을 흥분시켰죠. 마이클 잭슨은 중력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걸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잭슨보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진짜 중력을 무시하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거친 파도 위를 걸으셨습니다. 물 위를 걸을 때 예수님의 스텝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흔들리는 파도 위를 걷는 예수님의 스텝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보통 평지 위를 걷는 걸음과는 분명 달랐을 것입니다. 아마 그 모습을 봤다면 저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멋있어. 멋있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길들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세상을 따라가지 맙시다. 세상을 흉내 내지 맙시다. “내가 왜 돈과 명예를 원해. 내가 이것보다 비싼데.” 우리는 싸구려가 아닙니다. 우리는 비싼 사람입니다. 돈으로도 세상의 높은 자리로도 우리를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세상 어떤 것에도 굽실거리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돈과 명예, 성공을 위해서 여러분을 팔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살아가십시오. 세상에 물드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물들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베드로처럼, 마이클 잭슨처럼 멋있게 걸어가십시오. 중력도 바람도 파도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바람이 부는 파도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멋있게 스텝을 밟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굴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검은 바다와 같은 불확실성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졌던 수많은 사람들이 창피한 꼴을 당한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더 불확실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안전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베드로인지 아니면 다른 제자와 같은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베드로와 같은 결정을 안 내리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모두가 다 베드로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다면 똑바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세상이 삼킬 수 없는 당당한 워킹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자신감을 보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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