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길벗설교9] 기쁨으로 거두리라_시편 126편

설왕은 2019. 10. 27. 15:31

제목: 기쁨으로 거두리라

 

(시 126, 개정)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정말 잘 오셨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지혜와 용기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 번에 제가 좀 자극적인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제목은 “하나님의 맛”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무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강하게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우리의 심장이 부서지고 마음이 낙심되고 우리의 존재가 심하게 흔들릴 때 우리를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맛볼 정도로 강렬하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지난번처럼 시편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은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을 경험한 이들이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이어 갔는지 고백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시편은 단순한 성공담이나 기도 응답의 기쁨을 서술한 글이 아니라 삶의 모진 굴곡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시편 126편입니다. 126편을 잘 보시면 이상한 곳이 있습니다. 성경은 대충 보면 대충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말이 안 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대충 보면 말이 되니까 대충 보고 덮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번째, 자세히 보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무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세 번째, 자세히 보니까 말이 안 되는데 뭔가 더 있지 않을까 믿고,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취하는 방법은 세 번째입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취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고 이거 참 말이 되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죄송합니다만 대충 읽으셨을 확률이 높습니다. 자세히 읽어 보면 말이 안 되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떠세요? 잘 이해가 되십니까? 고민되시죠? 이해된다고 하면 대충 읽었다고 할 것 같고 이해 안 된다고 하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시편 126편은 아주 난해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1절과 4절입니다. 1절에 보면 사람들이 자유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아닙니다. 아직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학자들이 싸웁니다. 같은 사건이다 아니다 나뉘어서 싸웁니다. 다들 또 각자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1절에는 한국말로는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과거 시제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 구절은 원문으로는 미래완료형 시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래 어떤 시점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면서 미래완료형 시제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또 2, 3절에 과거 시제로 쓰인 동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이 두 사건이 다른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1절과 4절이 같은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4절은 현실의 바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1절은 현실의 바람을 꿈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한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편 기자는 굉장히 좋지 않는 상황에 있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간절히, 아주 간절히 원할 때 그 일이 꿈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절과 6절을 보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낙관적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고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확신이 있다면 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는 표현을 했겠습니까? 지금 상황은 너무너무 안 좋은 상황입니다. 전에 담임목사님이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요. 프랭클 박사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경험을 쓴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런 일화가 나옵니다. 가끔은 포로수용소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동료를 볼 때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남편이 아내가 혹은 아이들이 자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몸을 막 떨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깨우죠. “여보, 여보… 꿈이야.” 그런데 저자는 아우슈비츠에서 악몽을 꾸는 동료를 깨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악몽도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러한 상황처럼 시편 126편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데 고국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그냥 꿈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126편은 자신들의 상상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그때가 정말 온다면 우리는 기분이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향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때 우리 기분은 꿈꾸는 것 같을 거야.”라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상황을 그려보고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기분을 상상해 보면서 ‘정말 꿈만 같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슬프면서도 간절한 시편 기자의 바람이 전달되지 않습니까? 꿈을 꾸면서 꿈을 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꿈꾸는 그 순간이 오면 너무 좋아서 정말 꿈만 같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상상을 이어갑니다.

 

‘그 순간에 우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막 번지겠지. 우리의 혀는 가만히 있겠나? 아마 저절로 노래를 하겠지. 어떤 노래를 할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겠지. 신나게 하겠지. 목청껏 부르고 다같이 떼창을 하겠지. 주변 사람들, 주변 나라들은 가만히 있을까? 그들도 우리 하나님의 위대함을 칭송할 거야. 생각만 해도 좋은 일이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너무 좋아서 꿈만 같을 거야.’

 

그런데 4절에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하나님 이 꿈만 같을 것 같은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 보내달라는 간구는요. 이 지역의 남방 시내들이 여름에는 가뭄으로 인해서 메말랐습니다. 그런데 겨울에는 비가 많이 와서 이 시내들이 물로 가득 찼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상황이 메마른 강과 같을지라도 남방 시내에 비가 와서 물이 가득 차는 것처럼 그렇게 기적 같은 일을 우리에게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금방 꺾입니다. 5절과 6절에서 처절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울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직시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울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울면서 씨를 뿌리자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또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독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눈물을 흘리더라도 씨를 뿌리자고 독려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왜 격려하고 있습니까?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도 씨를 뿌리면 언젠가는 기쁨으로 추수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품고 지금 씨를 뿌리자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루어지길 소원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아, 내 삶에 혹은 우리의 삶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정말 좋겠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말 꿈만 같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그런 상황에 있지는 않습니까? 희망을 가지십시오. 가뭄에 쩍쩍 갈라졌던 강밑바닥이, 여름 장마로 물이 그 틈을 다 메우고 넘쳐서, 큰 물줄기를 만들어 굉음을 내면서, 군대가 돌격하는 것처럼 전진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십시오. 희망을 갖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의 문에 그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헛된 희망은 우리를 괴롭게 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희망은 오늘을 버텨낼 힘을 주기도 합니다. 제가 사람들 만나서 제 얘기를 하면요.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저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저만 안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청년들도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중년인데 아직도 청년처럼 살고 있네요. 여하튼 제가 사람들 만나서 제가 이런저런 상황에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제 말을 듣고 힘을 주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보통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될 거예요.”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좀 암울하게 느껴지지만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일단 “잘 안 될 거예요”보다 훨씬 낫죠? 그리고 그 말이 저는 그렇게도 들리기도 합니다. “당신은 잘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잘 될 자격이 있습니다.”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희망을 가져 봅시다. 우리 한 번 아멘으로 대답해 볼까요? 여러분 모두 잘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전혀 잘 될 것 같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해야 합니다. 미래에 잘 될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죽이면서 미래를 기다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시편기자는 뭐라고 말합니까? 울면서 씨를 뿌리자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울면서 씨를 뿌리면 나중에 기쁨으로 거둘 날이 올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둘 수도 있겠지만 내 아들 딸이 거둘 수도 있고 아니면 내 아들 딸의 아들 딸이 거둘 수도 있습니다. 내가 거두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 아멘으로 대답해 볼까요? 여러분 잘 될 겁니다. 한 가지 더요. 여러분 잘 안 되더라도 잘 삽시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지금은 눈물이 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누워서 꿈이나 꿉시다.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잘 안 되더라도 잘 삽시다. 눈물이 나더라도 선한 씨앗, 기쁨의 씨앗을 심어 봅시다. 우리의 살림살이가 풍족하지 않더라도 우리보다 더 빈곤한 사람들을 돌아봅시다. 현실이 암울하더라도 이웃에게 반갑게 웃고 인사하며 삶의 기쁨을 전합시다. 화가 나더라도 “너랑은 이제 끝이야.”라고 말하지 말고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줘 봅시다. 가진 자들의 횡포가 어이가 없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저항하고 어떤 세상이 올바른 세상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말해 줍시다. 울더라도 누워있지 맙시다. 일어나서 씨를 뿌립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꿈과 연결 지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으로, 상상으로, 꿈으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실 수 있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시간과 돈이 많아도 여기 계신 분 중 아무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실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으로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상상으로 꿈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에베레스트 텔레비전에서 좀 보셨죠? 상상하시면서 머리로 정상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가서 길벗 교회 교인들 다 모여서 찬송가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수련회 하고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상상으로요. 그런데 우리의 상상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신 분들은 엄청 기뻐하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분들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면서 그 정상에 올라갔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 것이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러한 기쁨이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기쁨을 위해서 고통을 일부러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도 여러분에게 고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두 시간 정도 하면 여러분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설교를 마치면서 기도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기쁨이 밀려올 것입니다. ‘와, 드디어 끝났다.’ 하시겠죠? 그러나 기쁨을 위해서 고통에 뛰어들거나 고통을 만드는 일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일부러 고통에 뛰어들지 않아도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견뎌야 할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으로 인해서 우리에게는 슬픔과 아픔이 생깁니다. 불교에서는 삶은 고해,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고통이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여러 가지 고통을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겪게 됩니다.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기쁨과 고통의 관계입니다. 고통은 기쁨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고통이 가진 역할이 있습니다. 고통은 기쁨을 ‘실체’로 만듭니다. 고통은 기쁨을 단단한 것으로,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것으로,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아름다운 것으로 만듭니다.

 

이렇게 비유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옷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 옷을 만들어 보신 분들은 별로 없겠지만 드라마나 동화책에서 베틀로 옷을 짓는 것 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비단이나 무명 옷을 만드는 것을 보면 베틀에 날실을 걸어 놓습니다. 날실은 세로로 길게 놓인 실입니다. 여기에 씨실을 엮어서 옷을 만드는데요. 씨실은 가로로 놓인 실입니다. 날실은 밭고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에 씨실로 씨를 심듯이 엮어서 옷을 짜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날실에 기쁨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날실, 씨실이라는 이름 참 지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날 것의 인생, 있는 그대로의 인생은 고통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철학적 진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생을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씨를 심으라고 격려합니다. 씨실로 날실을 엮어내듯이 기쁨의 씨앗으로 고통을 엮어내는 것입니다. 날실만으로 옷을 만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씨실만으로 옷을 만들 수 없습니다. 날실만으로 옷을 만들어 보십시오. 아니면 씨실만으로 옷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것이 제대로 된 옷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 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옷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조금이라고 움직이면 바람에 의해 흘러내려가 버려서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이라고 좌절하고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살거나 혹은 인생의 쾌락만을 추구하며 모든 고통을 회피하려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결국 “심한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기쁨의 씨앗을 심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농부로 부르셨습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에 기쁨의 씨앗을 심는 농부로 부르셨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땅에 벼를 심으면 우리는 그곳을 논이라고 부릅니다. 밭에 고구마를 심으면 우리는 거기를 고구마밭이라고 합니다. 포도를 심어 놓은 곳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포도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고통이 많은 고통의 바다와 같은 곳이라도 우리가 여기에 기쁨의 씨앗을 심고 그 열매를 거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하겠습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11)

 

우리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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