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길벗설교10] 문을 여는 사람_요한복음 4:3~18

설왕은 2019. 11. 24. 12:00

본문: 요한복음 4:3~18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제목: 문을 여는 사람

길벗설교10 "문을 여는 사람" 요한복음 4:3~18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와 사랑과 지혜가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입니다. 길벗교회의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이고 동시에 가족 초청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마음이 들뜨네요. 사람의 특성 중 하나인데요. 마음이 즐거우면 사람이 시끄러워집니다. 여러분 조용한 잔칫집에 가본 적 있으세요? 없으실 겁니다. 잔칫집에 가면 왁자지껄 시끄럽습니다. 오늘은 잔칫날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시끄럽게 떠들 수 없으니까 얼른 말할 수 있으려면 예배가 끝나야겠죠? 빠/르/게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지도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여행 경로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림을 한 장 보겠습니다. 윌리엄 다이스가 그린 “사마리아의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있고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어떤 것 같습니까? 한 번 자세히 보세요. 밝고 명랑한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좀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입니까? 자세히 보시면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느껴지실 겁니다. 

 

윌리엄 다이스 "사마리아의 여인"


이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럽고 천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왜 그랬는지 더 자세한 설명은 제가 설교 예고에서 했으니까 넘어가겠습니다. 못 보신 분들은 나중에 한 번 보세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만나는 것 자체를 꺼려했고 만나도 유령처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를 지나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떠났고 예수님만 혼자 우물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시각은 정오였습니다. 6절에 보면 6시라고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 사용하는 시간은 아침 여섯 시부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1시는 아침 7시고요. 제6시는 정오입니다. 이스라엘이 더운 나라인데 정오면 꽤 더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렇게 더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오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한여름에 우물가에 가서 물을 떠 와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가시겠습니까? 아마도 아침 일찍 가실 거예요. 그리고 보통은 여인들이 함께 모여서 물을 뜨러 다녔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더운 시간에 혼/자/ 물을 길으러 온 이유는  이 여인은 따돌림당하고 있었고 또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싶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 와서 조용히 물을 떠서 가려고 왔는데 한 남자가 우물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옷차림이나 행세를 보아하니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마음이 /더/ 불편해졌습니다. 째려보는 이 눈빛 보이십니까? 예수님의 뒤통수를 응시하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라, 가라, 가라, 가라, 간다, 간다, 간다, 간다.’ 예수님이 뒤통수를 긁고 있는 듯한 이 장면이 재밌습니다. 뭔가 뒤통수가 따가운 듯 손을 머리 뒤로 대고 계십니다. 이 여인은 이 어색하고 불편한 만남을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물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을 겁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했는데요. 어떻게 말을 했을까요? “야, 물 줘” 이렇게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매우 예의바르게 부탁했을 것 같습니다. “저, 실례지만 제게 물을 좀 떠 주실 수 있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무례하게 말을 했다면 아마도 이 사마리아 여인은 무시했을 것입니다. ‘아… 역시 유대인 놈들’ 이렇게 마음속으로 욕하면서 무시했겠죠.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놀라서 물어봅니다. 


“아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걸지 않는데 왜 선생님은 저에게 말을 거시나요?” 
그러자, 예수님이 또 길게 대답을 하시고 대화가 죽 이어집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과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면 당신이 저한테 물을 달라고 했을 거예요. 그러면 제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입니다.”
“아니, 선생님은 물 길을 도구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제게 물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주려고 하는 물은 이 물이 아닙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다시 목이 마를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이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 저에게 그 물을 주십시오. 그래서 다시 물 길으러 올 필요도 없이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당신 남/편/을 데리고 오세요.”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지만 지금 남편도 당신 남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네, 여기까지입니다. 이 뒤에도 중요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문을 여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문을 여는 사람이고요, 다른 하나는 문을 닫는 사람입니다. 문을 닫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만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요. 좋은 기회가 오면 얼른 문을 닫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기회가 갈까 봐 얼른 문을 닫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그런 소문이 있었는데요. 어떤 박사 과정을 하는 한국 학생이 한국어로 쓰인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자신의 논문으로 낸 거예요. 미국 사람들은 알 길이 없죠. 그런데 나중에 그것이 발각돼서 그 학생도 퇴학 처분되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다니는 모든 한국 학생들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문을 닫는 사람입니다. /// 반대로 문을 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내 삶으로, 그리고 공동체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과 함께 잘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기회가 오면 자신만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어서 많은 이들이 같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취할 이득이 줄어들게 되는데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질문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문을 여는 사람입니까, 문을 닫는 사람입니까? 네, 예수님은 문을 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문을 여셨는지 요한복음 4장을 한 번 잘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어떻게 말을 걸었습니까? 그냥 말을 건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여인은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아서 정오에 뙤약볕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몸도 힘들었겠지만 마음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물을 마셔야 살 수 있으니까 물을 길으러 오기는 오는데 몸도 마음도 너무 불편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그 이유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 당시에 랍비들은 세 번 이상 결혼을 하면 그 결혼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섯 번째 혹은 여섯 번째인 남자는 이 여인의 남편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여인에게 손가락질하고 색안경을 끼고 봤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여인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손가락질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 사람이 자존감이 높을 리가 없습니다. 누가 이 여인에게 따뜻하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이 여인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이 여인은 더러운 여자, 재수 없는 여자, 이상한 여자로 취급받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녀와 말을 섞기 싫어했을 것이고 어떤 관계도 맺기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이 이웃에게 도움을 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 것입니다. 그냥 말을 건 것이 아니라 도움을 청했습니다. 말을 거는 것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야, 비켜.”라는 말과 “저 좀 도와주세요.”라는 말은 완전히 다르죠. 보통의 유대인이라면 목이 말라서 곤욕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에게 유령 취급을 받던 이 여인은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의도적으로 부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을성이 많은 분입니다. 40일 금식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목이 말라서 부탁을 하셨다면 대화 중간에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잠시만요, 그런데 우리 물 좀 마시면서 대화할까요?” 예수님은 일부러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 사마리아 여인은 누군가에게 명령이 아닌 혐오 발언이 아닌 부탁을 받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문을 여신 것입니다. “여기 들어오셔서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세요.”라고 했는데 여인이 대답합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사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압니다. 어서 가서 남편을 데리고 오세요.”라고 말씀하셨다면 이 여인이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입장에서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의 복/잡/한/ 심/정/을 다 알고 이 여인의 편을 들어 줍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지금 남편도 전 남편도 당신 남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예수님은 여인의 괴롭고 복잡한 마음에 공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을 열어 주시면서 이 여인의 마음까지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문을 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웃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하는 이 여인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녀의 자존감을 높여 주고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며 그녀의 입장에 함께 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을 여는 사람이지만, 반대로 이 사마리아 여인은 문을 닫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봅시다. 이 여인을 주제로 한 복음성가도 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런데 이 가사가 의미하는 바가 있죠. 이 여인이 자신이 원해서 남편을 다섯 번 갈아치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가사입니다. 그런데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이 여인은 자신이 원해서 다섯 번이나 남편을 갈아치운 것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여러분, 다섯 번 이혼하고 결혼하는 여자를 지금도 찾아보면 있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주도적으로 이혼하고 결혼하는 여자는 보통 어떤 분입니까? 어떤 분이 떠오릅니까? 다섯 번인지 알 수는 없지만 보통 돈이 많고 아름다운 할리우드 배우 정도 돼야 몇 번씩 결혼을 하고 그러죠. 그 정도로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혼하고 결혼을 하려면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이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여성의 지위가 훨씬 더 낮았습니다. 사람 숫자 셀 때 여자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으니까요. 경제적으로 부유했을 리도 없고요. 그랬다면 다섯 번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살았던 이 여인은 자신이 원해서 새 남편을 구했을까요? 만약 나쁜 남자를 만나서 고생했고 그래서 이혼하고 다시 결혼했는데 또 나쁜 남자였다면 보통은 ‘남자라면 지긋지긋해’라고 생각하며 혼자 살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 번이나 남편이 바뀌었다면 자신이 주도적으로 남편을 갈아치운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정확한 사정은 알기 어렵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남자와 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이 여인은 이 남자에게서도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없었다고 말을 했을 것입니다. 물동이도 지긋지긋하고 남자도 진저리 났을 것입니다. ‘내가 그 인간을 만나서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생수를 줄 수 있다고 하자 여인은 귀가 솔깃했습니다. 당장에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 저에게 주세요.” 여인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물동이 버려 버리고 난 훨훨 날아가 버릴 거야.’ 여인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 “네, 남편이요?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본능적으로 문을 닫고 있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이 기회, 소름 끼치도록 지겨운 물동이와 남편으로부터 구원받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문을 닫습니다. 이 부부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남편도 이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매우 서운했을 것입니다. 나의 배우자가 어디 가서 자기는 남편이 없다고 혹은 아내가 없다고 말한다면 서운하거나 혹은 화가 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얼마나 삶이 힘들었으면 얼마나 남편과의 관계가 어려웠으면 남편이 없다고 말했을까요?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도 사람들의 따돌림이 힘들었으면서 자기 남편을 따돌리려고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문을 닫았습니다. 은근슬쩍 슬그머니 닫은 것이 아니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급하게 문을 꽝 닫았습니다. 

세상에는 문을 여는 사람과 문을 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길벗 교회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문을 여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문을 닫고 우리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을 마시면 되겠습니까? 아니죠. 아닙니다. 우리도 문을 열어야 합니다. 불편하고 어색하고 때로는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는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생명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에 악인이 있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끊는 것이 구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여러분이 조직폭력배와 관계되어 있다면 그 관계를 끊어야 구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과 그녀의 남편과 같은 부부 관계는 서로 헤어진다고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 관계는 보통 사랑과 증오로 얽혀 있습니다. 예전에는 정략결혼이 있었지만 요새는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사랑해서 결혼합니다. 그런데 결혼하면 어떻습니까? 좋기만 합니까? 아닙니다. 안 맞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미울 때도 있습니다. 아주 미울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구석이 많이 있어서 잘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문제가 있을 때 이혼하고 아이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마음에 안 드는 직장의 부하 직원을 해고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것이 우리 예수님이 행하신 방법입니까? 

기독교는 나까지만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는 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문을 열고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기꺼이 도움도 받으시고 또한 도움도 주십시오. 이 세상에 ‘나홀로 구원’은 없습니다. 내 주변이 모두 불행한데 나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울고 있는데 나만 웃는다면 그것이 구원입니까? 우리는 함께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없어지면 좋을 것 같은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과 같은 이웃이 있더라도 그를 따돌리지 마십시오. 문을 여시고 그와 함께 구원을 받으십시오. 예수님처럼 문을 여는 사람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설교 요약

1. 세상에서는 문을 여는 사람과 문을 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이 문을 여는 방식은 타인의 자존감을 높여 주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해 주는 것입니다.

3. 사마리아 여인은 구원의 기회가 오자 문을 닫으려고 했습니다.

4. 이 세상에 '나홀로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구원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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