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추상적인 기도 안내서_유진 피터슨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설왕은 2019. 10. 4. 23:30

유진 피터슨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작가입니다. 기독교 목회자 중에서 유진 피터슨 정도로 글을 쓰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저도 유진 피터슨의 글을 즐겨 읽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을 한 권 더 읽어 보고 싶어서 최근에 나온 책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찾아보니 원서는 1985년에 나왔지만 우리나라에는 2014년에 나온 책이네요. 책의 앞표지에 "자신에 대한 관심을 공동체로 되돌리는 시편 기도"라고 나와 있어서 친근함이 느껴졌습니다. 기도를 가르치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시편 아니면 주기도문이죠. 차례를 보니 열한 편의 시편을 통해 기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피터슨의 주장은 간단 명료합니다. 기도는 사적일 수 없고 항상 공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정치 신학적으로 시편을 풀어내면서 기도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기대와는 달리 책은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중간 정도 읽다가 멈추었습니다. 더 읽을만 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피터슨의 글은 매끄럽게 잘 쓰였습니다. 문제는 저자가 가지고 있는 기도에 대한 제한적인 견해였습니다. 피터슨은 모든 기도는 정치적이지만 종교인은 정치에는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정이 분리된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렇죠.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종교인이 어떻게 정치에 관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피터슨이 내놓은 대답은 기도로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나 너무 팔자 좋은 견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한 기도는 물러서지도 않고 맞서지도 않는다. 건강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잘못 돌아가는 부분이나 나의 내면에서 잘못 돌아가는 부분을 처리하는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과 나의 내면에 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악은 간접적으로 처리된다." (96-97)

 

이런 식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데 직접적인 참여가 아니라 간접적인 참여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다소 방관자적인 입장입니다. 저는 이런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으로 저항하고 맞서는 정치 신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수도 있고 좀 더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위해 협조한다는 식의 관점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그런 보수적인 관점을 시편을 통해서 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죠. 시편은 처절함과 찌질함의 바탕 위에 쓰인 글입니다. 죽을 것 같은 위기 속에서 아무런 희망을 없는 것 같은 절망 속에서 쓰인 시편이 많습니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다.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절망의 늪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 처절하게 하나님을 부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어 찌질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나온 글들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유진 피터슨은 그런 상황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미국의 중산층 백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성공한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쓰여진 추상적인 기도 안내서입니다. 비슷한 위치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재밌는 읽을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사회의 소외된 계층이 볼 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피터슨은 기본적으로 미국 사회에 대한 인식이 매우 긍정적입니다. 기득권 계층에게는 미국 사회가 매우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부유한 기득권 계층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가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공적인 행위라는 주장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기도뿐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공적인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니까요. 혼자 사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눈을 감고 기도함으로써 정치적일 수가 있다는 말은 궤변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를 맺는 것이 정치와는 아예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러나 유진 피터슨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극히 기득권 계층의 그것과 유사하고 기도에 대한 그의 사고가 너무 제한적이라서 이 책은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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