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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은 나귀 형제이다_C.S.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에서

설왕은 2019. 10. 17. 20:01

 

 

 

C.S. 루이스가 말하는 에로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봅시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에로스나 인간의 몸에 대해서 연구하고 발표한 바도 분명 있겠지만 그 영향력의 측면에서 볼 때 C.S. 루이스보다 더한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정통 기독교에서 에로스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어떤지 C.S.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을 통해서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C.S. 루이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사랑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말하는 에로스란 단지 육체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에로스와 구별하여 육체적인 사랑을 C.S. 루이스는 비너스라고 칭합니다. 루이스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비너스는 "에로스에 내재한 육적이고 동물적인 성적 요소"입니다.(160) 에로스는 비너스를 원칙적으로는 포함하지만 C.S. 루이스는 구분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너스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비너스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비너스의 쾌락을 추구할 때 사랑에 빠지는 것이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C.S. 루이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단지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가 처음에 말한 대로 "사랑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로스에 대해서 C.S. 루이스의 생각을 살펴볼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육체적인 사랑을 어떻게 볼 것인가?

둘째, 사랑에 빠지는 것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먼저, 우리가 육체적인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면서 어려운 문제입니다. 육체적인 사랑이 좋은 것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타락시키고 수많은 악행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요. 또한 논리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과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신의 입장에서도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몸을 준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도 인간이 이런 식으로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그다지 유리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유전자의 번성 측면에서 본다면 훨씬 더 좋은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는 이런 과정은 '왜'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루이스가 인간의 몸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글에 잘 나오는데요. 한 마디로 하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랑을 한다는 것을 그는 "하나님의 조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살고 사랑한다는 것은 웃기고 재밌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너무 죄악시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우리가 비너스를 지나치게 진지하게-잘못된 종류의 진지함으로써-대하고 있고, 또 그렇게 부추김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68)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성에 대한 옛날식의 유쾌한 웃음입니다." (169)

 

"그 놓치고 뒹굴고 맞불고 하는 모든 상황을, 우리는 다만 어린아이의 놀이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로스처럼 그렇게 원대하고 초월적으로 보이는 열정이 이렇듯 육체적 욕구와 어울리지 않는 공생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제게는 하나님의 조크로 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로스 안에서 가끔 우리는 하늘을 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비너스는 갑작스럽게 우리를 잡아당겨, 실은 우리가 땅에 묶여 있는 기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173)

 

"인간이 자기 몸을 보는 관점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몸을 영혼의 감옥 내지 '무덤'이라고 불렀던 저 금욕적인 이교도들과, 몸을 '똥 부대'이며 벌레의 먹이며 더럽고 창피스러운 것이며 악인에게는 유혹을, 선인에게는 수치를 주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 피셔John Fisher 같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입니다. 둘째는 몸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신이교도들, 누드주의자들, 그리고 암흑의 신들을 신봉하는 자들의 관점입니다. 셋째는 자기 몸을 '나귀 형제'라고 부른 성 프란체스코의 표현에 나타나는 견해입니다. 이 세 관점 모두 나름으로 일리는 있겠지만, 저는 성 프란체스코의 관점이 옳다고 봅니다." (173-74)

 

"'나귀'는 정말 기가 막히기 딱 맞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제 정신이라면 누구도 당나귀를 숭배하거나 증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쓸모 있고 억세며 게으르고 고집스러우며 끈기 있고 사랑스러우며 성질을 돋우는 짐승입니다. 때로는 채찍, 때로는 당근이 필요하며, 측은해 보이는 동시에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아름다운 짐승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우리 몸이 삶에서 감당하는 기능 중 하나가 광대 역할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 그것과 더불어 사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셈입니다." (173-74)

 

루이스의 표현을 적어 두고 싶어서 위에서 인용을 많이 했습니다. 루이스는 인간의 몸을 더럽고 악한 것으로 보거나 아주 신성한 것으로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의 의견에 찬사를 보냅니다. 인간의 몸은 나귀 형제라는 것이죠. 저도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숭배의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한 존재도 아닙니다. 하지만 고집이 세고 다루기 어렵고 그렇지만 아름답기도 하고 또 우스꽝스럽기도 하죠. 우리 몸이 삶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광대라는 그의 주장은 염두에 둘 만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이스가 에로스에 대해서 설명한 것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 중 다른 한 가지는 에로스를 신성화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에로스는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우상화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에로스 자체를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져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에 어떤 권위를 부여하고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어떤 행동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실수나 잘못이라고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에로스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악을 향해서 돌진할 수도 있다는 지적은 매우 예리한 지적입니다.

 

"정말이지 에로스는 자기보다 높은 규범에 의해 지속적으로 단련되고 보강될 때 비로소 계속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187)

 

"에로스의 그러한 숭고성과 자기 초월성으로 선뿐 아니라 악을 향해서도 돌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4)

 

"에로스 역시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182)

 

사랑해서 한 행동은 무조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루이스는 에로스에는 고삐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에로스 즉 사랑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만 에로스는 금방 사그라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반대의 경우가 더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고 루이스는 지적합니다. 

 

C.S. 루이스는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의 몸에 대한 생각과 또한 에로스의 위험성에 대해서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기억해 둘 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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